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봉주 전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연재 다섯 번째 자료는 최용덕(1920~2004) 애국지사의 수기(手記)다. 최용덕 선생은 1998년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자서전을 작성했는데 성장 과정에 이어 학도병 징집과 탈출, 광복군 참여 후 해방을 맞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친필원고는 분실됐지만 장남 최영일 씨가 옮겨 친 원고가 남아 있다. 정봉주 전 위원장이 2022년 최영일 씨로부터 입수한 수기와 함께 사진·신문기사 등의 관련 자료를 본사에 보내왔다. 원문대로 싣되 가독성을 위해 단락을 나누고 소제목을 달았다. <편집자 주>
내일이 그날이었다. 내가 아무에게도 하지 아니한 이 말을 하기 위해 같은 우리 남해인이며 도선산을 모시고 있는 삼동면 대지포 최윤근을 찾아간 시간은 밤 10시 30분경이었다. 소등나팔과 점호가 끝나고 모두가 잠이 든 때였다. 내일의 거사를 말하고 너는 일본군에, 나는 임시정부로 가서 서로 죽은 것을 고향에 전하도록 약속을 하였다. 이때 울며불며 작별을 아쉬워하며 같이 따라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7인 간의 비밀이니 아니 되며 곧 죽을 길을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이라고 여러 번 당부 끝에 작별했다.
우리는 굳은 결심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보무당당하게 작전명령으로 전투에 나간다고 하니 기록을 하고 영문(營門)을 통과시켜주는 것이다. 영문을 수비하는 수비병의 계급은 이등병이었다. 낮은 상등병 이하여서 상관의 명령에는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일본군이기 때문이다. 이때 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무거워지며 조심스럽다. 떨리게 된다. 여기가 사선의 제일 관문이기 때문이다.
작전명령으로 위장해 7인 함께 탈출
정문 앞에는 큰길 100m 정도의 길을 넘어가는데 그 얼마나 긴장이 되어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견디고 견디어서 어서 빨리 전진을 재촉하였다. 길을 넘어 잠깐 돌아가면 약속한 집이 있다. 곧바로 그 집에 들어서니 중국군은 우리를 인도하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영문을 탈출하는 데는 평소에는 담당 장교가 항상 영내를 돌고 있고 즉시 보고를 하게 되는 것인데 이날은 육군기념일이기 때문에 영내의 장교는 전원 식후 일찍부터 한 시간 전에 벌써 외출하여서 위안부와 놀고 있고 졸병만 남아 있는 것을 절호의 기회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자 밤이 되어서 10시 점호를 하니 여기저기 소속에서 함께 7인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밤에 찾을 수 없어서 아침에 점호하고 탈출한 것을 알았으니 이때부터 추격을 전개하였다. 이전에 윤근 군은 직접 조사를 받았으나 모른다고 하였고 창문 안에서 우리의 영문을 무사히 탈출을 바라보고 그 얼마나 초조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는 조선사람 한 사람에 일본사람 한 조를 만들어 대소변도 동행하였다. 우리는 곧바로 군복 군화를 버리고 중국군 편의복장으로 편의대가 되어 군인의 인도를 따라 7인의 생명을 인도자에게 맡기고 한문 글자로 통화를 하면서 작은 작크선을 타고 크리크라는 하천을 배 타고 숨어 들어간다. 육지에서 보면 배로 가는 것은 보이지 아니한다. 밤이면 육지로 도주한다. 안내자는 머리가 영리하였다. 2~3일 앞으로 갈 길까지 밀정을 보내서 연락한다. 우리가 도착하는 곳마다 미리 알고 있고 식사를 시키고 대환영을 한다. 일본군이 뒷날 곧 따른다. 주민들은 우리가 가는 곳을 반대로 말한다. 자꾸만 떨어진다. 일주일 만에 유명한 이태백(李太白)이 놀던 태호(太湖)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일상생활의 말부터 배우게 된다.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생활이다. 태호는 육지의 호수인데 직선으로 맞은편 사람이 보이지 아니한다. 돛배의 크기가 여수와 부산 간의 연락선 정도의 것이며 풍파는 큰 바다의 파도를 상상한다. 반(半) 이쪽은 일본군이 설치고 반 저쪽은 중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형편이니 지형상 그렇게 되어 있다. 호수면 갈대 속에 잠복하고 있는 작은 배 숫자는 7척이나 되었는데 일본군이 새벽에 습격하다 배 한 척에 우리는 호수 반 넘어가기로 하고 중국군 약 20명은 배를 타고 일본군과 응전을 하다가 대장 조카가 생포되었다. 그동안 우리를 이 호수까지 데려다준 안내자는 가버렸으니 갈 길을 잃고 7일간 그 호수에서 있는 동안에 우리 광복군 전방 정보부원이 알고 장개석 군인 장교와 함께 데리러 온 것이다.
일본군 격파 소식, 중국 신문에 소개돼
처음으로 오랜만에 우리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이 반가웠다. 이곳에서 체류할 수 없으니 오늘 저녁에 도주해야 한다고 한다. 뒷날 새벽 건너편 사람이 보일 정도다. 무서운 절벽 아래 큰 강이 돌고 있는데 배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에, 도착하자 한쪽 기슭에 배를 준비하고 있는 중국사람과 이렇게 연락이 약속되어 있고 그 배는 우리를 건너 주고 멀리멀리 사라진다. 절벽 같은 산에 올라간다. 그때 마지막까지 추격해 오던 일본군이 건너 조금 멀리 말하는 소리는 들려도 구별은 하다가 못하다가 소대포와 일본군이 보인다. 우리는 뛰어오른다. 약 300m 정도 오르면 산속 길로 들어가 버린다. 반쯤 오르는 동안 일본군이 소대포를 쏜다. 소총도 쏜다. 소총 알이 나열해 오는 중국군 모자를 벗기고 인명 피해 없고 곧바로 피해 버렸다.
이것이 일본군을 마지막 작별하는 곳이다. 숨어서 들리는 말이 할 수 없이 놓쳐버렸다 하면서 산을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 산속으로 들어가니 중국군이 500명 정도 주둔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큰 환영을 받으면서 여러 날짜 주둔하였다. 동남아지구 총사령관 고축동(顧祝同, 구주퉁) 충의구국군이었다. 여기가 일본군 전선이고 중국군 전선인 접전지다. 우리는 일본군 전선 지구를 잘 알고 있기에 충의구국군을 30명 데리고 일본군 전선 분견대를 야습하기로 계획하여 3차례나 성공을 하니 전리품이 많았다. 전과 상장도 받았으나 다 분실되었다. 몸 하나만 빠져 다니게 되니 종이 한 장도 무거운 것이다.
중국군과의 매일도 10일 넘어서 중경을 가겠다고 지원하니 비행기 편이 1개월 정도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때 상요(上饒)라는 곳에 도착하여 중국군 참모본부에 도착하니 작은 몸의 참모장은 태평양전쟁 미군 전승 세력을 설명하더니 8월 15일경 되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것이라 한다. 이 말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 여기서 4㎞ 정도 있는 곳에 광복군 10여 명 주둔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이제 우리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된다니 말이다.
이보다 먼저 중국군과 세 차례나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는 컸으며 전 중국에 신문 보도되고 중경 임시정부에서도 알게 되어 크게 기뻐하였으니 우리 광복군의 각지 주둔군은 크게 도움이 되었고, 중국에서도 크게 환영하고 산중에 잠복하고 있는 미군은 또 우리 7인을 불러 환영식을 하고 어릴 적부터 대학까지 일본 글만 배워서 일본사람이 된 줄 알았는데 제 나라 제 조국을 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즐거워하였다.
여기 잠복되어 있는 우리 광복군을 찾아갔으니 이때가 오후 4시경이었다. 해가 넘어가려면 2시간 정도 남았다. 즉시 남은 수박을 앞에 두고 환영회를 한다. 이때 경북 안동이 고향인 김만덕 동지, 충남 논산 남길우(南吉祐) 동지를 만났다. 박승유(朴勝裕), 김권(金權) 또 2지대 2구대장 이소민(李蘇民)과 일분대(一分隊)에 입대하고 광복군 사기 앙양과 결속으로 다음 야습을 계획하는 등으로 4~5일 이곳에서 보낸다. 그 얼마나 행복한 나날이었으며 내일의 조국 광복의 희망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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