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봉주 前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이번호는 하전 이상태 선생의 보훈부 공적서 자료 게재 마지막 회로, 해방 때까지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계속해온 이상태 선생이 해방 후 조국 재건과 부흥을 위해 지방 사회사업에 투신, 남해수산고등학교 신축 이전과 육영사업에 힘을 쏟다 1955년 12월 24일 작고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와 별도로 이상태 선생의 기공비 내용도 수록했다. 정봉주 전 위원장의 도움으로 공적서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 바꿔 게재한다. <편집자 주>
공적서
경남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105번지
애국지사 하전 이상태
1891.09.17.~1955.12.24.
9. 이상태의 독립운동의 활약은 간단없이 계속되었으나 일제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한민족의 황민화 정책도 최후 발악으로 극에 달하여 독립운동이 극도로 제약을 받게 되자, 1943년 2월에 삼동면 동천리 271번지 구릉에 해관암(海觀庵)을 지어 수양을 가장하고 동지들을 불러들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동지들이 다 떠나고 주위가 적막하면 그는 홀로 남해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조국의 앞날을 관조하고는 깊은 시름에 잠기고 저도 모르게 장탄식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의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심신을 채찍질하여 가면서 독립운동과 독립자금 모금 활동은 조국이 해방되기까지 멈추지 않았으니 그의 조국에의 일편단심은 만고에 빛날 것이다.
10. 이상태는 조국의 해방에 누구보다도 감격이 깊었으나 그 감격도 가시기 전에 조국의 재건과 부흥에 이바지코저 지방의 사회사업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삼동면 미조리 소재 남해수산고등학교를 면소재지 지족리로 이전 발전시키기 위하여 면 유지들을 설득하여 학교 이전 신축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의 대임을 맡았다.
자신의 농토와 많은 재산을 희사하고 관계요로(문교부, 도교육위원회, 도건설국 등)를 동분서주하는 등 불철주야 노심초사하였다. 남해의 어업 발전에 기여코저 육순의 노구를 이끌고 수산 육영사업에 생애 최후의 정력을 소진하게 되니 수년의 각고 끝에 마침내 쓰러지고 와병으로 두문불출의 몸이 되었다. 1955년 11월 12일[공적서 원문은 ‘12월 21일’이나 착오로 보여 수정함] 휠체어에 실린 몸으로 학교 낙성식을 참관하였으니 과연 누가 그의 감개와 허무를 통찰하였으랴.
학교 낙성식 후 불과 한 달여[원문은 ‘3일’] 만에 이 남해의 거목 독립투사가 쓰러지니 삼동면민들의 애통함은 친부상 못지않았다 한다. 남해수산고등학교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학교장(學校葬)으로 그 영령을 위로하고, 그의 독립 공적과 학교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55년 11월 12일 교정에서 하전 이상태의 기공비를 건립하였다. 그 비문은 별지와 같다.
11. 전국 애국청년들로 1909년 조직된 대동청년당원(大東靑年黨員)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 활약했었고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윤병호(尹炳浩, 애국지사, 대통령표창 수상, 63년도)는 평소 이상태 선열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하전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은 실로 크고 장한 것이며 이렇게 훌륭한 선열이 남해 출신임은 정말 남해의 자랑이요 명예가 아닐 수 없다”고 역설하고, 국회의원 입후보시 정견발표 때마다 이상태의 독립운동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항일투사 정신을 길이 받들어야 한다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여 군중으로부터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었다.
12. 1954년 4월경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장군은 이상태의 와병중에 친히 비서를 대동하고 남해에 와서 이상태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상호 독립운동 시절을 회고 위로하였는데 철기(鐵驥, 이범석의 호)는 “하전(河筌)의 발병은 일제의 잔악한 고문 탓이다”라고 분개하면서 낙루(落淚)하니 주위는 숙연하였다.
13. 남해 향민들은 아직도 한결같이 이상태의 불굴의 항일독립투쟁을 찬양하고 그의 애국, 애족, 애향 정신을 흠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숭고한 호국영령 이상태의 독립 공적에 대하여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수반되는 것이 도리이며, 따라서 국가는 마땅히 상훈에 있어서도, 훈격의 재심, 재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1990년 2월 5일 독립유공자 홍창식(洪昌植)
하전 이상태 선생 기공비
선생은 일찍이 민족을 사랑하고 교육을 장려하며 산업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시더니, 삼일운동 때는 임시정부와 깊은 관계를 가지시어 국내 요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왜정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시지 못한 채 오랫동안 영어의 고초를 받으셨고, 민생경제에 깊은 뜻을 쓰시어 특히 수산업 발전에 큰 공을 남기시었고, 만년에 이르러 수산학교를 이전 신축하자 궁핍한 재정으로 원대한 계획을 세워 지방 인사와 굳게 손을 잡고 널리 동지의 협조와 당국의 원조를 받아 육 년 동안 병구를 이끌고 불철주야 불피풍우의 노력과 물심양면의 공헌으로 오늘의 이 석조전의 위관을 이루게 되었음은 실로 선생의 공적이라 이에 비에 새겨 길이 후세에 빛내고저 하는 바이다.
단기 사천이백팔십팔년 십일월 십이일(1955.11.12.)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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