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봉주 전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연재 다섯 번째 자료는 최용덕(1920~2004) 애국지사의 수기(手記)다. 최용덕 선생은 1998년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자서전을 작성했는데 성장 과정에 이어 학도병 징집과 탈출, 광복군 참여 후 해방을 맞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친필원고는 분실됐지만 장남 최영일 씨가 옮겨 친 원고가 남아 있다. 정봉주 전 위원장이 2022년 최영일 씨로부터 입수한 수기와 함께 사진·신문기사 등의 관련 자료를 본사에 보내왔다. 원문대로 싣되 가독성을 위해 단락을 나누고 소제목을 달았다. <편집자 주>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라고 하는 것을 듣기도 하고 책에서도 읽었지만, 인생 육칠십 저물어지고 보면 그 맛을 더욱 느끼게 하는 것을 잊지 아니한다. 젊은 시절 게으름도 또 할 일도 날마다 괴로워서 아직도 시간의 여유가 미래에 있다고 미루어 온 이 글쓰기를 칠십이 넘어서 이제 쓰려고 하니 너무나 힘이 든다. 왜냐하면 일들은 밀려있고 힘은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감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려고 하면 먼저 두통이 일어나고 펜을 든 손은 굳어지고, 뻣뻣해져서 곱게 쓰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정도이다.
그러자 한정된 인생을 언제나 젊음이 있으며 죽어가는 것을 자각도 아니하는 또 그런 교훈도 없고 한 것을 뒤돌아보면 일찍이 알아야 하고 설계도 일찍이 뒤따라서 황금 같은 시절을 허송하는 일이 없도록 참고가 됐으면 싶다.
여기에 내가 나의 수기를 쓰고 싶은 것보다 지난 옛날의 선조님들의 고생스러운 모습을 쓰면서 어둡고 믿기 어려운 정도까지의 그 모든 것을 다 써 볼 수는 없고 한 면이라도 기록을 남겨서 추억을 되살리고 가문의 발전사를 다시 보면서 여기에 연결되는 나의 수기도 기록해서 후대에 참고가 되기를 원하는 바이다.
할아버지 지산 최효석, 사립동명학교 설립
우리는 입남(立南) 할아버지부터 입령[立靈, 영지마을에 들어옴] 할아버지로 내려와서는 여기 이곳 곶 안에서 소금 굽는 염전 생활을 했다. 그때의 모습은 처절하게도 곤경에 빠졌겠지, 양반제도 말세가 되었으니 천한 대접을 받고 산 환경을 쓰리게 추측하면서 아침이 지나면 저녁 먹을 걱정을 하는 시절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동학 시절을 만난 4대조 규철(奎哲) 할아버지(선장곡 수봉리 산하에 묻힘)는 동학란을 만나 겨우 생존할 수 있었고 문인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지산 최효석:1855~1937] 할아버지가 태어나셨다. 할아버지는 일찍이 한문 서당에서 한학자가 되셨으며 학문에 대한 열성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하셨다고 하시며 평생 농사일은 하지 아니하고 새벽 일찍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송독하시고 주간에는 인근 각지의 서당을 찾아서 훈장 교육에 노력하셨다.
이때 내가 알게 된 때가 8, 9세 때이다. 1920년에 내가 출생하여 8~9년이니 1928년 때이며 일본 세력으로 왜정이 되고 있으며, 이때 보통학교에 왜글 배우라고 선생님들이 가정방문을 하면서 입학을 권유하였다. 그때 나이가 9세였다. 더 많은 사람은 입학을 못 하게 되고 겨우 우리 동리 100호가량 중에 4~5명이 입학하였다.
할아버지는 원근 동리 훈장을 하시다가 학교를 설립하여서 사학의 창설을 지금의 난령초등학교 동편 부지 내에 서당식 동영학교를 운영하게 되고, 그 후에 인근 생원골에 사립동명학교를 설립하여 이때에 일본어 교육을 겸하게 되고 일본 사람 교사까지 3~4명 정도였다고 한다.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서 우리나라 제2, 4~5대[원문은 초대] 국회의원 2명이나 당선되었다.
책만 가득한 할아버지 서재에서 성장
여기 학교 후대들이 주축이 되어 난령학교를 지금과 같이 현대화를 하고자 최익수(崔翊洙) 삼촌님이 회장이 되어 자조회(自助會)를 조직, 연 2회 보리와 벼를 한 말씩 전 주민이 모으게 되고 드디어 지금의 학교가 창설되었으니 회장을 중심으로 그때의 단결은 위대하였고 그 정신의 원천은 한학을 배운 제자들의 학문열인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학교 자산으로써 학교 건너편 사림[개인 임야]과 소유 논을 2두락 희사하였고 우수하게 경영하였다 한다.
인근 동리민을 길거리 회화 식으로 선행을 역설 교화하였고 길에 동덕이나 나무조각 하나까지도 솔선 제의하였으며, 남해 읍내 가용말(家用馬)을 타고 출입할 적에 지방 사람들이 다리 가설 작업을 하면 반드시 내려서 격려의 부조금을 제공하고 지나가며 대구 영남지방과 가까운 진주지방 백일장에서 집필만 하면 장원을 하셨다. 평생에 서울 과거에 세 번이나 응시하였으나 섬사람이라고 심사도 아니하였으며, 대리시험을 봐주면 꼭 급제하는 정도였으니 희대의 면학도였다.
사서삼경과 그 많은 경서를 일생을 다하여 송독하셨다. 본인이 8~9세 때에 할아버지는 함께 잠자고 마을 뒤편 해안을 데리고 다니고 임종 시에는 식사 시 할아버지 손발이 되었다. 인자하시고 학문에 대한 연구심은 그때에는 참으로 어깨를 같이 할 사람이 없었으니 말 없는 동안에도 손자는 학문열을 배운 것이다. 한문 시의 유집이 있으며 묘소는 난음 장인산에 있다. 없는 가정이어서 서울 가는 노자는 할머니가 남해 심천리 정씨(鄭氏) 댁에서 번번이 마련하였다 한다. 돈으로 통장 저금을 하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아니하였고 할아버지 책만이 가득한 것을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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