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봉주 전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연재 네 번째 자료는 광복군 최용덕(1920~2004) 선생이 직접 작성해 1982년 원호처(현 국가보훈부)에 제출한 공적서다. 최용덕 선생은 삼동면 출신으로 사립동명학교 설립자인 지산 최효석 선생의 손자다.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 소주지구 경중기부대에 배속돼 있다가 탈출, 광복군에 편입해 전투에 참가했다.
1982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학도병 탈출 동지인 류재영, 성동준 애국지사가 작성한 인우보증서(隣友保證書)도 이번에 입수돼 공적서 내용`을 뒷받침해준다.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최용덕 선생의 학도병 탈출과 광복군 가담에 대해 “중국신문에 보도되어 국제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편집자 주>
공적서(功績書)
본적: 경남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2532
주소: 상동
성명: 최용덕(崔龍德)
생년월일: 1920년 5월 20일생
1944년 1월 20일 대구에서 일본군에 입대 후 7일 만에 대구를 출발, 중국 중지(中支)에 파견 일군(日軍) 60사단 제46대대 제2중대에 배속받아 초년병 훈련을 받게 됨.
※ 당시 전례로 보아 초년병 훈련 기간은 3개월이었으나 우리 학병들은 1개월로 필하고 최전방 토벌 작전에 동원되었음. 그 당시 같이 훈련을 받았던 학병들은 다음과 같음.
① 장형순(張泂淳) 전북 김제 출신, 前 국회부의장
② 박현섭(朴鉉燮) 부산 출신, 한국 BBS 중앙연맹회장
③ 채규응(蔡奎應) 전북 출신, 장수군 장계종고 교장
④ 류재영(柳在榮) 전북 출신, 前 전북도교육감
⑤ 송문규(宋文奎) 전북 전주 출신
⑥ 최용덕(崔龍德) 경남 남해 출신
1944년 7월 본인은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되어 소주(蘇州) 지구 경중기부대(輕重機部隊)에 배속받고 류재영, 정석진(鄭石珍), 정병훈(丁炳勳) 등과 접선, 일본군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함.
그 당시 우리는 소주시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는 한국인 이씨(李氏, 이름은 잊었음)와 접선되어 우리 일행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한국광복군 주둔 지구까지 가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상주현(常州顯)에서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60사단 제47대대의 성동준(成東準) 동지와도 모의되어 있었음.
1945년 2월 10일 삼전구(三戰區) 광복군 징모(徵募) 제3분처와 접선되어 한국인 행상 이씨의 소개로 중국인 안내원과 동행하기로 하였음. 본인은 사전에 11연식(年式) 경기관총 사수(射手)였기 때문에 총기를 완전히 준비하여 일군을 탈출하는 데 성공, 약속 장소인 서문(西門) 밖에 당도하니 탈출 결사대원 7명이며 다음과 같음.
※탈출 결사대원 명부
① 故 김봉옥(金鳳玉), 전북 군산 출신, 일본중앙대학, 6.25 피난선 침몰 사망
② 故 성동준, 전남 순천 출신, 구주제대(九州帝大) 법학과 졸, 전 문교부 차관
③ 故 김영남(金暎男), 전남 완도 출신, 동경전수대(東京專修大) 졸, 6.25동란 시 안동전투에서 헌병대위로 전사
④ 故 정병훈(丁炳勳), 전북 진안 출신, 동경법정대(東京法政大) 졸 6.25 때 행방불명
⑤ 박영(朴英), 경남 울산 출신, 동경소압전문(東京巢鴨專門) 졸, 前 호놀룰루 총영사
⑥ 류재영, 충남 금산 출신, 명치대(明治大) 정경학부, 前 전북도교육감
⑦ 최용덕, 경남 남해 출신, 일본중앙대(中央大) 법과, 현 남해에서 농업
또한 일본군 남경상비사관학교(南京像備士官學校)에서 장교 교육을 받은 후, 일본군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탈출할 때 휴대한 무기는 ① 3.8식 소총 6정 ② 경기관총 1정 ③ 탄환 500여 발임.
그리하여 우리는 그동안의 군대 체험과 조국 독립의 정신을 발휘하여 일군 1개소대 병력과는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군 공용 완장을 팔에 감고, 집단행동을 통해 일본 헌병 검문소를 통과하여 몇 차례의 위험한 고비를 벗어나 광복군에서 파견한 안내원들과 미리 준비한 두 척의 나룻배로 중국인 안내원 등씨(鄧氏)의 필사적인 협조로 우리 일행은 무사히 일군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동산도(東山道)에서 독전(獨戰)해가면서 중국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 총지휘부 육군대위 정보장교 왕대위(王大尉)와 회동, 일군 분견대 및 화평군(和平軍, 당시 汪精衛[왕징웨이] 정권) 병사(兵舍) 등 습격해가며 강소성(江蘇省) 합촌지방(合村地方)에 주둔하고 있는 충의구국군 제1종대본부에 도착, 그때 충의구국군 이중령(李中領, 대대장)이 일군에 생포되어 있었는데 일군의 이중령과 본인 등 7명과 교환하자는 교섭이 있어 본인 1명을 이대장(李隊長)과 교환하기로 하였던 바 호상(湖上) 협상에서 전투가 벌어져 본인은 천우신조(天佑神助)로 탈출하였음.
1945년 4월 절강성(浙江省) 왕가탑(汪家塔) 충의구국군 정치부에 배속되어 각종 대적(對敵) 공작을 하다가 제3전구(第三戰區) 사령부에 도착하여 제3전구 사령부 사령장관 顧祝同[구주퉁] 대장, 각 참모 및 미 군사고문(美軍事顧問)들의 참석 하에 일본군 배치 사항, 주요 무기 배치, 일본군 군사훈련 등을 보고하여 연합군 작전에 다대한 전과(戰果)를 올리게 하였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전 의장 이강(李岡) 선생, 정화암(鄭華岩) 선생, 광복군 징모분처(徵募分處) 김문호(金文鎬) 주임 그리고 이소민(李蘇民) 구대장(區隊長) 등과 항일전쟁에 참가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감격의 해방을 맞이하였음.
1982년 2월
신청인 최용덕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 광복 소식에 남해 만세운동 회상하며 한시로 감회 읊어
- 남해 3.1운동 주동자로 2년 옥고…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남해수산고 신축 이전에 재산 희사…수산 인재 육성에 헌신
- 유림단 조직 항일운동…진주·남해 어업권 확보에도 총력
- 1919년 남해 독립만세운동 주도 공적 기록
- “칠십 넘어 쓰는 나의 수기, 후대에 참고되길”
- 일본유학 중 학도병 징집, 대구 거쳐 중국 쑤저우 배치
- 다른 학도병들과 목숨 건 탈출 감행…‘7인의 탈출’로 기록
- 중국군 도움받아 일본군 추격 벗어나, 마침내 광복군 합류
- 일본 항복 소식에 환호…광복군 위세 떨친 7인 동지
- ‘만보산사건’ 규탄 격문 배포로 옥고,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