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봉주 전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연재 다섯 번째 자료는 최용덕(1920~2004) 애국지사의 수기(手記)다. 최용덕 선생은 1998년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자서전을 작성했는데 성장 과정에 이어 학도병 징집과 탈출, 광복군 참여 후 해방을 맞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친필원고는 분실됐지만 장남 최영일 씨가 옮겨 친 원고가 남아 있다. 정봉주 전 위원장이 2022년 최영일 씨로부터 입수한 수기와 함께 사진·신문기사 등의 관련 자료를 본사에 보내왔다. 원문대로 싣되 가독성을 위해 단락을 나누고 소제목을 달았다.  <편집자 주>

최용덕 애국지사와 같이 탈출한 류재영(전 전북도 교육감)이 지은 학도병 수기 『7인의 탈출』(삼지원)
최용덕 애국지사와 같이 탈출한 류재영(전 전북도 교육감)이 지은 학도병 수기 『7인의 탈출』(삼지원)

몸은 시들어 괴로워서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 무변 대륙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이곳이 처음 닥치는 벅찬 가슴을 일으키는 만주 벌판이었다. 너무도 추웠고 군용열차 때문인가 손님은 적었고 빈틈없이 따스하게 옷을 입고 있는 중국 사람이 한두 사람이 보인다. 영하 31도라고 한다. 말을 하기 어렵고 코에서 나오는 김이 코앞에서 언다. 소변도 언다. 멀리 바라보니 모닥모닥 눈덩이가 보인다.

그러자 기차는 산해관을 넘어 북경 쪽으로 달린다. 기억이 아득하다 저 멀리 만리장성이 보인다. 나는 도망할 계획만 치밀해진다. 산둥성을 지나 남경으로 가는 모양이다. 차가운 눈빛은 적어진다. 남쪽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우리 남해 정도의 눈 적은 경치이며 산이라고는 하나 볼 수 없고 바라보는 대륙벌판은 가슴만 벅차고 붉은 아침 해도 육지 끝에서 올라온다. 처음 보는 괴이한 느낌이다.

호신술이라 생각하고 군사훈련 배워

황하(黃河)를 기차로 상해(上海)를 지나니 소주(蘇州, 쑤저우)에 오후 1시경 도착하여 우리 왜놈 군인 복장으로 걸어가는 대열 군화 소리는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차갑고 싫어하는 소리로 생각되었겠는가, 공연히 남의 나라에 들어서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주 미인이 보인다. 모두가 미인이라고 한다. 부대에 들어섰다. 대열을 정리하고 각 소속을 정한다. 나는 소총부대였다. 이로써 조국 강산을 떨어져 이역만리 타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전지 생활을 하려고 뿔뿔이 제각기 마음 아닌 작별을 하게 된다. 

개탄스럽고 쓸쓸한 마음이 들어 견딜 수 없으나 사육되는 가축처럼 끌려다니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길을 슬기롭게 넘어서야 한다. 고된 기초훈련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사람을 죽이려는 일이니, 일본군의 행동은 야만적이다. 거기에다 정신 타격이야말로 얼마나 속 눈물이었으며 때로는 둥근달 밝은 밤에 그렇게도 추운 밤에 총칼을 들고 야경을 할 적에는 고향의 그리움 말할 수 없고 달 보고 말하고 싶고 달은 고향을 비추어 주며 말해주는 듯 가까워지는 듯도 하였다. 죽어도 개죽음이다.

내 나라 내 민족의 번영과 행복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압박을 당한 중국 국민을 압박하는 앞잡이 노릇이라니, 이 얼마나 애석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끌려와서 우리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학생인 우리를 훈련시켜, 미군 상륙하는 전차에 폭탄을 가지고 육박 자살하라는 훈련이다. 살 수는 없고 모든 인생의 행복을 다 버리고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죽어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곧 무술이며 몸을 지키는 호신술로 생각하여 열심히 배워서 그중에서도 우등생이었다. 그리하여야 한다는 나의 계획이다. 

류재영 애국지사의 학도병 입대부터 탈출‧귀국 경로(출처: 『7인의 탈출』). 대구 입대부터 중국 쑤저우(蘇州) 배치 및 탈출까지 경로는 최용덕 선생과 일치하며, 입대 전 일본에서 귀국하는 경로는 다르다
류재영 애국지사의 학도병 입대부터 탈출‧귀국 경로(출처: 『7인의 탈출』). 대구 입대부터 중국 쑤저우(蘇州) 배치 및 탈출까지 경로는 최용덕 선생과 일치하며, 입대 전 일본에서 귀국하는 경로는 다르다

쑤저우 거주 한인 의사 만나 탈출 계획

기초교육을 수료하고 일차 장교 교육을 받게 되니 소주에 다시 합동 교육하러 만나게 된다. 얼마나 반가운 것인가. 훈련을 마치고 합동 목욕을 큰 교실 같은 데서 같이 할 적에는 우리말로 꽃을 피우고 까마귀 떼처럼 즐거워한다. 여기서 탈출 계획은 익어간다. 주일마다 일요일은 외출하게 된다. 그 얼마나 반가운 일이며 절호의 기회인 것인가. 그러자 계획은 우리나라 사람 집을 찾게 된다. 처음은 단결하자고 하는 사람이 10인이 넘었으나 결사적 단결에는 7인이 되었다. 영문(營門)을 나갈 적에 반드시 알게 되고 알면 다 죽게 되는 일을 단행한 데는 벌써 마음은 죽음을 각오하지 아니하고서는 결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남 완도에서 소주에 와서 의사 선생님을 하시는 분을 알게 되어 2~3차례 외출 시 꼭 놀러 가서 맛이 있는 김치를 얻어먹고 우리는 군대에서 배급되는 담배를 갖다 드렸다. 2~3차례 만나는 동안 이 선생님이 우리의 탈출을 비밀로 협조할 것이다. 일본군의 밀정이 되면 우리는 실패이고 우리 편이 된다면 성공할 수 있으니 바라는 바는 협조해줄 것이다. 큰 소원이다. 죽고 사는 것은 또,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우리 7인 중에 다행히도 완도 출신이 한 사람 있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몸도 큰데다가 유도 4단이다. 그러자 또 7인이 모여서 외출하였더니 그때 방에 밀려있는 신문을 보니 임시정부 소식의 신문이었다. 이 순간 옳거니 생각되었다. 이 선생님이 독립군에 협조하는 사람인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즉석에서 못했던 탈출의 계획을 말했다. 우리의 결행 날짜는 3월 10일 일본군 육군기념일이다. 이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바쁜 형편이기 때문에 조속히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 합심 합의하고 중국인 안내인을 다음 주 외출 시에 면회시켜 주겠다고 한다. 마음 초조하게 결심이 되고 굳세게 몸이 조이며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 7인은 손모아 부모님께 기도하고 천지신명에게 기원하였다. 살려주시오 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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