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봉주 전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1919년 4월 4일 남해 독립만세운동 주동자로 2년간 옥고를 치른 정익주(鄭益周) 선생이 1962년 작성한 자필 공적서를 게재한다. 정익주 선생은 1896년 설천면 금음마을에서 출생해 1975년 작고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본보는 정익주 선생의 공적서 게재에 이어 정익주 선생의 자필 옥고(獄苦) 회고담, 자작시를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공적서
본인은 기미 삼일운동 혁명 당시에 경남 남해군 주모자로 동지를 구합하여 본군 시일에 대한독립만세를 선동한 바 군중 수백 명이 일시 호응하여 산천이 진동케 하고 당시 왜놈 순사부장, 왜놈 학교 교장, 금융조합장 등에 대한독립만세를 호창케 하여 성대한 시위운동을 하였더니 그후 왜놈의 관헌에 포착되어 그 당시 본군 주재소 및 삼천포경찰서에서 이구난설할 무수한 악형 고초 심문을 약 일 개월 동안 받고 진주검찰청에 송치되어 각군 동지와 미결에서 삼 개월 동안을 경과한 후에 검사 구형 3년, 판사 판결 2년을 받은 후 진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발병 월여에 청약 도중 왜놈 간수가 구두 발길로 협부를 맹축한 바 약 20분 동안 절명 회생한 사실은 동지들이 공지하는 바이며, 그후 만기되어 귀가한 후 간간 그 여독이 지금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광복 후 3·1절에 본군 군·경이 연합하여 초대한 바 되어 기념품으로써 식기 대접 한 벌 받고 그 후 군, 면으로부터 상부 지시에 의하여 보고한다고 조사는 하여 갔으나 무소식이옵기 금반 진주원호지청에 호소하였더니 지시가 유하옵기 진정하나이다.
그리고 광복 후에 저의 부자 역시 반공투쟁에 군경을 연락하여 극역하였더니 장남 행규(鄭幸圭)는 본군 공산분자의 제1회 우익요인 숙청자에 걸리어 권총을 가지고 행규를 암살하려고 저의 집 근처에 왔다가 미수되었다는 사실을 경찰에서 문지하고 낮이면 산골로 밤이면 이웃집 골방으로 천신만고를 하다가, 6·25 사변 이후에 괴뢰군 입남 소식을 듣고 소선을 구하여 가족 솔권 피난 도중에 삼남 정석규(鄭石圭)가 당시 고성경찰서에 경위 직으로 있었는 고로 고성경찰서를 경유한 바 순경 20여 명을 인솔하고 투벌차 없는 고로 경찰 가족이라 하여 고맙게도 백미 1가마를 얻어가지고 거제도에 가서 1주일 피난하고 부산에 가서 약 2개월 후에 아군 탈환함으로 인하여 귀가하여 사소한 농업으로 보명하나이다.
현명하신 귀하께옵서는 동찰하시와 원호 법규 최고 선처하여 주시옵기를 호소 복망하나이다.
서기 1962년 월 일
경남 남해군 삼동면 난음리 1166번지
정익주(鄭益周)
원호처 국가유공자 심사위원장 귀하
상기 사실 상위 없음을 확인함
서기 1962년 월 일
남해경찰서 지족지서장 경사 강남수
남해군 삼동면장 최형렬
남해경찰서장 기형섭
남해군수 고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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