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봉주 전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연재 다섯 번째 자료는 최용덕(1920~2004) 애국지사의 수기(手記)다. 최용덕 선생은 1998년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자서전을 작성했는데 성장 과정에 이어 학도병 징집과 탈출, 광복군 참여 후 해방을 맞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친필원고는 분실됐지만 장남 최영일 씨가 옮겨 친 원고가 남아 있다. 정봉주 전 위원장이 2022년 최영일 씨로부터 입수한 수기와 함께 사진·신문기사 등의 관련 자료를 본사에 보내왔다. 원문대로 싣되 가독성을 위해 단락을 나누고 소제목을 달았다. <편집자 주>
이때 형님 용복은 겨우 보통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그 시대의 신학문 일본어를 배우려 하였으나 할아버지는 반대하셨다. 그때 일본으로 가려면 도항증명서를 경찰 당국에서 허가받아야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형님은 밀항하게 되었다. 나는 형님의 수재 머리로도 취학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보고 안 되겠구나 단념하면서 부모님이 보내는 2년제 남해농업실수학교에 들어갔다. 여기는 농업 그대로의 일꾼이며 야채 기르는 학문이었다. 퇴학은 말할 수 없고 겨우 마치고 나도 일본으로 형님을 찾아서 대판(大阪, 오사카)으로 갔다. 대판은 공업도시이며 학생은 적었다. 형님은 5년을 마치고 대학을 지원할 것을 4년을 마치고도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기에 동경으로 가게 된다. 곧 얼마 안 되어서 나도 동경을 따랐다.
동경은 문화의 도시이며 깨끗했다. 가까운 곳에 고학할 수 있는 직장이 없었다. 모두가 방을 얻는 것이나 직장도 조선사람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 일본인들의 배척이야말로 도저히 동화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고등경찰이라는 일본 경찰 당국은 우리나라 학생들이 공산주의 책 보는 것을 철저하게 단속하였고 동경 우리 학생회가 YMCA로부터의 학생 독립운동 사상의 조사에는 침식을 못하더라도 단속이 심하였다.
우리 국내에서는 제국주의 계급이 완벽하여서 일본을 좋아하는 협력 분자만이 출세하였고 농민들은 수확한 농산물을 공출(供出)이라는 제목으로 생산된 쌀을 우리 농민 부모님의 식량도 남겨두지 아니하고 보리밥만 먹게 하고 약탈을 한 것이다. 모두가 일본으로 반입되었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남방격전지로 수송 도중에 폭격을 맞아 너도나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살 수 없어 북간도로 살던 고향을 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떠난 것이 지금의 이산가족이다. 이때 나는 동경에서 면학에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944년 1월 20일, 아내와 작별하고 입대
대학 2학년이 되자 하루는 요즘에 곧 우리나라 학자들이 재일 학도들의 일본전쟁에 참여하라는 지원 권유의 사람들이 온다고 했다. 그렇게 크게 상대도 하지 않고 지원병이라면 지원하지 않으면 된다고 아주 낙관하고 그런 말은 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하자 2~3일 지나더니 3~4인이 와서 명치대학 강당에서 대대적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기 2일 만에 대학 교문은 전부 폐문하고 고등계 형사들이 찾아들며 지원을 강요한다. 그야말로 조직적이며 무서운 강제 지원이다.
그리하여 나는 침구 일체를 화물로 책과 함께 보내고 고향 부모님 슬하를 찾아들었다. 고향은 섬이어서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행정군청, 면장, 형사와 함께 총동원 합동하여 지원을 강요한다. 나는 절대로 반대하고 산으로 계곡으로 숨어다니다가 결국 잡혔다. 부모님을 경찰에서 감금하고 견딜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지원했다.
그때 우리 동네에서는 족숙(族叔) 되는 봉준 씨와 두 사람이 지원한 것이다. 지원을 한 뒤에는 약 1개월간 시간의 여유가 있었으나 그때 봉준 씨는 나에게 북경에 계시는 형님을 찾아간다고 동행을 권하였으나 결코 지금 와서 그 순간이 가게 되느냐 그만두느냐에 좌우 결정이 운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아무리 연구를 거듭해도 처군(妻君, 배우자)과 작별을 고하고 1944년 1월 20일 난음리 송○○ 군과 함께 난령초등학교 교정에서 장행회라는 명목으로 환송의 의식이 있는 중 교정 옆에 있는 신사참배를 하라는데 반대하였으나 송 군은 참배하였다. 입대한 후에 군대 인사 준위에게 남해경찰서로부터 신원조회가 참배 거부의 통보에 따라 조사를 받았으나 평소 가장한 용병 모습으로 답변을 극복하여 무사히 군대 생활은 계속되었다.
대륙 향하며 ‘나 하나 숨을 데 없으랴’ 생각
처음 입대는 대구 부대였다. 부대 병영은 크게 되어 있으나 텅텅 비어있고 잔류병이 약 10명 정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이 병사에서 쓸쓸한 차가운 널방에 짚으로 만든 곳에 일주일 생활을 하는 동안 45세 되는 일본병의 한 사람이 입을 연다. 남방부대에 있다가 미군 폭격을 받아 배에서 전원이 전사하였고 자기는 널판자에 떠밀려가는 중에 적십자 병원선에 발견되어 살게 되었고 대구 병사에 처박혀 부대 소속이 작성되지 않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면서 동경서 쌀집 쌀 배달을 하다가 45세 때 영장을 받고 입대했다고 한다. 그때는 군인이 모자라서 45세까지 동원령이 있다는 것을 우리도 알았다. 45세쯤 되면 인생이 가정에 집중되고 군인으로서는 부적절한 것이 사실이다. 눈물을 흘리며 고향에 부모 처자가 보고파 우는 것이다. 나는 왜[일본] 사람들을 용감하고 죽어서 보국한다고 하더라마는 역시 사람은 다 같이 공통된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각지 처군들은 예쁜 얼굴로 남편을 찾아온다. 면회가 빈번하고 많은 음식을 얻어먹게 된다. 그러나 섬 중에서는 그런 일도 없으니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었다. 더욱 쓸쓸한 마음은 나의 심신을 굳세게 하였고 그리하자 6일 만에 중국 소주(蘇州, 쑤저우)로 간다는 것이다. 넓은 벌판인 대륙 전선으로 간다는 말을 듣자 그 얼마나 용기백배 되며 나 한 사람 숨어들 데가 없으랴 하는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졌다. 이것은 나만의 비밀이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비밀이었다. 그 7일 만에 완전무장을 하고 군화 소리 척척 맞추어 가며 대구역을 오후 4시쯤 떠났다. 대구 지방의 부인들은 눈물로 외치며 이별을 못 이겨 운다. 무정한 기차는 달려간다. 우리는 전선으로 개죽음당하러 끌려가는 것이다.
차내에서는 점호가 자주 있고 엄숙함을 명령하는 수송 소위관이 있었다. 지금은 이북 땅을 달린다. 군데군데 떼를 지어 노래를 부르며 떠나가는 고국을 외쳐본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지경이다. 고국 경계선인 압록강 철교를 정각 자정에 지난다. 압록강 그리고 조국의 마지막 경계를 보내는 캄캄한 한밤중을 달린다. 기차는 무정한 철로를 철그덕 소리만 내면서 달린다. 하는 수 없어 저절로 달려가는 기차 속에서 조국을 바라보고 요배(遙拜)와 경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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