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는 말[馬]의 고장이었다
남해는 말[馬]의 고장이었다
  • 임종욱 인턴기자
  • 승인 2021.10.01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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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석문 이야기 #6
면민동산비석군 (창선면)
면민동산비석군 (창선면)
축마비(이동면)
축마비(이동면)
응상백(凝霜白), 조선 태조가 탔다는 팔준마(八駿馬)의 하나
응상백(凝霜白), 조선 태조가 탔다는 팔준마(八駿馬)의 하나
창선목도세견면정씨익환사적비(창선면)         축마비(이동면 무림시장)
창선목도세견면정씨익환사적비(창선면)             축마비(이동면 무림시장)

12간지 중 하나이기도 한 말[馬]은 우리 민족과는 오래 전부터 친근한 동물이었다. 우직하고 성실하기로는 소[牛]가 윗길이지만, 말은 전마(戰馬)부터 역마(驛馬), 승마(乘馬) 등 전쟁이나 이동 수단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또 건육마(乾肉馬)라 해서 식용으로 공납될 만큼 ‘말고기’도 별식으로 간주되었다. 그 뿐인가. 말은 가죽부터 털, 힘줄까지 쓰임새도 다양했다. 말총은 갓이나 장신구를 만드는 데 쓰였고, 가죽은 악기 재료로 필요했으며, 심지어 마분(馬糞)은 비료나 약재의 원료, 연료로도 요긴했다.

말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길러졌다. 고구려 무용총에는 씩씩하게 말을 타고 달리는 <수렵도>가 있고, 신라의 천마총에는 하늘로 승천하는 비마(飛馬)그림이 생동감이 넘친다. 말을 잘 방목해 충분한 수자를 유지하는 일은 국부(國富)를 유지하는 첩경이었다.

그래서 마정(馬政)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국가에서 항상 큰 관심을 가지고 유지하고자 했다. 때문에 곳곳에 말을 키우는 목장이 세워졌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시대 때는 174개의 목장이 있었고, 고려시대 때도 160여 군데 목장이 운영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도 초반에만 200여 개 존재했고, 종사하는 인원도 9천 명을 넘어섰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쇠퇴해, 인조와 효종 무렵 119개로 축소되었고, 숙종 때는 73개의 목장이 간전(墾田, 밭으로 개간함)되었다.

아시다시피 남해는 이런 일련의 말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목마(牧馬)하면 제주도가 먼저 떠오르지만, 남해에서의 말 기르기 역사도 만만치 않다.

창선을 중심으로 펼쳐진 목장
창선 섬은 우리나라에서 열한 번째로 큰 섬이다. 육지에 붙어 있는 데다 중앙에 꽤 넓은 평지가 있어 말을 기르기에 적합했다. 강우량이 충분했고, 목초지를 만들기에도 알맞아 이른 시기부터 말을 많이 키웠다.

조선이 개국된 때부터 창선에서는 말을 방목했다. 나라가 열리자 갑자기 말을 키웠을 리 없고, 고려 때부터 이미 창선은 말의 주산지였을 듯하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창선면 부윤1리 면민동산에 모아놓은 비석군이다.

여기에는 12개의 비석이 줄지어 서 있다. 그 중 10개가 감목감(監牧官)들의 선정비다. 감목관은 종6품 이상의 관직인데, 목장을 관리하고 마적(馬籍)과 목자(牧者)의 호적을 보관하며 목자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관원이다. 이들의 선정비가 줄지어 세워졌으니, 창선도는 감목관의 ‘꿀보직’이었을 듯하다.

직접 말을 기르고 돌보는 일을 하던 사람이 ‘목자’였는데, 조선시대 때는 한때 5,178명에 이르렀다. 신분은 신량역천(身良役賤)으로 양민에 속했지만, 천역에 가까운 일을 했다.

창선에 남은 감목관들의 선정비는 1722년 세워진 <감목관유공태웅선정비>가 가장 오랬고, 1881년 세운 <행감목관원후현창구폐선정비>가 가장 최근 것이다. 그 이전에도 세워졌을 것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없어진 듯하다. 비석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위쪽이 네모나게 깎인 것이 보인다. 사람들이 건물을 짓거나 할 때 잘라간 것이라 한다.(힘도 좋다.)

말 때문에 빚어진 안타까운 역사도 있다. 창선 상신마을회관 앞에는 <창선목도세견면정씨익환사적비(昌善牧賭稅蠲免丁氏益煥事蹟碑)>(1940년 세움)가 있다. 조선 중기 때부터 목장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도세(賭稅)를 정해 부과했다. 그러다 갑오경장(1894년) 때 목장은 없어졌는데, 도세는 남아 주민들의 고충이 막심했다.

이를 해결하려 앞장 선 이가 정익환과 동생 정무근(丁務根) 씨였다. 이들은 4년여 동안 도성으로 올라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국 목적을 관철시켜 1908년에 폐해를 없애고 말았다. 이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남해 본섬에 웬 목장인가?
목장과 관련한 폐단은 창선에만 머물지 않았다. 개국 때부터 창선에서 말을 기르더니 순치(順治, 중국 청나라 연호, 1644~1661) 전후 감목관들이 땅을 점유할 목적으로 본섬에서도 말을 키우게 했다.

논밭을 뭉개고 아름드리 적송(赤松)을 불태우니 주민들의 피해가 엄청났다. 흩어지고 떠나 섬이 비게 될 판이었다. 이를 견디다 못한 몇몇 사람들이 조정에 폐지를 건의했고, 관찰사도 조사해 장계를 올렸다. 그 결과 1655년 말떼는 창선 목장으로 돌아갔고, 남해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이때 노심초사했던 사람들의 노고를 기려 같은 해 <축마비(逐馬碑)>를 세웠다. 이 비석은 이동면 난음리 대밭마을 1128번지 손종순 씨 댁 마당 안에 있는데, 사진에서 보다시피 높이 240cm, 너비 380cm되는 큰 바위에 새긴 마애비다.

이동면 무림시장비석군 안에도 <축마비>가 있는데, 1928년 2월 마애축마비가 세월과 비에 갈려 흐려지자 옛 업적을 기리고자 다시 새긴 것이다.

지금 창선면 동부대로 2310번지에는 남해군 공공승마장이 세워져 있다. 아직 제 기능을 다하지는 못하는 듯하지만, 승마장은 이런 옛 사연이 있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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