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는 각 읍면별로 다양한 금석문들이 존재한다. 상당수는 예전 남해에 부임했던 현령이나 첨사 등의 송덕비(영세불망비), 공적비 등이지만, 각 지역이 배출한 효자나 열녀, 미담의 주인공 이야기에서부터 특정 시설물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과 기여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자칫 숨어버릴 수 있는 사연들도 많이 담겼다. 훗날 남해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빠져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들이다. 그 중 중요한 것들을 골라 열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남해 금산을 바다에서 보면 머리에 온통 돌을 이고 있다.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중턱부터 정상까지 온갖 기암괴석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낸다. 남해 사람들은 그 풍경과 돌의 형상마다 이름을 붙여 ‘금산 38경’이라 부른다. 부소바위, 상사바위, 흔들바위, 좌선바위 등 이름만으로도 상상이 풍성해진다.

이런 바위들은 자연이 빚어낸 선물이지만, 사람들이 손으로 다듬고 깎아 글을 새긴 돌들도 있다. 이를 금석문이라 하는데, 남해에는 수백 개가 흩어져 있다. 개인 묘지에 있는 비석까지 합치면 엄청난 규모일 것이다.

돌에 글을 새긴 까닭은 그 내용을 오래 보전하기 위해서다. 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까? 내용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돌에 새겨진 숨은 역사를 찾는 첫 날, 남해읍 주변에 있는 금석문 몇 개를 살펴보았다.

먼저 찾은 곳은 유배문학관 초옥 앞뜰에 선 <봉천사묘정비>(군 보호문화재 3호)다. 이 비석은 높이만도 2미터 86센티로 곁에 서면 육중한 느낌을 준다. 1828년 세워졌으니 거의 2백 년 세월을 살았다.

봉천은 유배문학관 뒤편을 흐르는 개천 이름이다. 그 개울 근처에 세운 사당이 봉천사다. 누구를 위한 사당이고, 누가 세웠을까?

남해에 두 차례 유배를 왔던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을 기렸던 곳이고, 남해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80여 년이 지난 1800년에 건립했다. 이이명은 <구운몽>의 작자 김만중의 사위이기도 한데, 유배를 와서는 남해의 문인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시와 글을 지으면서 남해의 학문적 뿌리를 다졌다.

이이명은 영조(연잉군)를 세제(世弟)로 삼는 일이 꼬여 두 번째 유배를 왔다가 결국 한강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뒤 남해 사람들은 그가 이곳에 심어놓은 학문의 터전을 잊지 않고 있다가 봉천사를 세웠던 것이다.

이 비석은 봉천사 뜰에 세웠는데, 이이명이 남해에서 남긴 지워지지 않을 업적에 대해 기술했다. 버스터미널 도로 맞은편 언덕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3백년 전 이이명과 남해의 선비, 학동들이 모여 도란도란 글 읽던 일을 떠올려도 좋을 듯하다.

봉천사묘정비를 뒤로 하고 강진만 해변에 있는 선소로 가보자. 항구가 보이는 입구 중앙 정자가 있던 곳(지금은 더 앞으로 옮겼다) 옆에 비석 몇 개가 모여 있다. 그 중 하나는 <선소축항기념비>고, 또 하나는 <박진평시혜비>다.

축항비는 높이 171센티고, 시혜비는 127센티다. 각각 1932년과 1930년에 세워졌다.

선소(船所)는 이름 그대로 배가 드나드는 자리를 뜻한다. 오래 전부터 읍으로 들고 나는 물품의 창구로 기능했는데, 갯벌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해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이런 아쉬움이 이어지다가 1925년 면장 임종길이 청원해 마침내 재물과 자금이 모여 축항 공사가 전개되고, 1929년 3월 완성을 보았다.

그때부터 선소는 명실공히 남해를 대표하는 항구가 되어 물산이 풍부해지고 재보가 든든해졌다. 축항비는 바로 그 때의 공사 과정과 수고한 이들의 노고를 새긴 비석이다. 또 이 공사에 남해 사람 박진평이 희사금을 냈다. 밭 1천여 평을 기부받아 매립을 위한 토석 채취를 도왔는데, 그 은공을 쓴 비석이 ‘시혜비’다.

두 비석을 읽으면 선소 항구가 지금 모습을 갖추기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과 봉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항구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아 ‘선소새횟집’ 골목을 들어서면 끝에 우람하기 짝이 없는 큰 바위를 만나게 된다. 공룡알을 연상하게 하는 거대한 덩어리가 바닷물이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이 바위 한 면에 마애비(磨崖碑)가 있는데, ‘마애’란 바위를 갈아 글이나 그림을 새겼다는 뜻이다.

<장량상동정마애비>(경남 유형문화재 27호)는 덩치가 7, 8미터 쯤 되는 돌 한 구석에 높이 253센티, 너비 131센티 규모로 매끄럽게 파 글을 새겼다. 1599년 10월에 새겼으니, 420여 년의 세월을 버텼다.

장량상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병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한 인물인데, 중국 역사서에도 특별한 기록이 없다. 성씨가 장씨임을 알 뿐이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1598년 이후에도 남해에는 왜병의 잔당들이 남아 소탕전을 1년여 벌였다.

소탕전이 끝난 뒤 장량상이 이를 기념해 바위를 깎아 마애비를 만들었다. 원래 이 바위는 20여 미터 위쪽에 있었는데, 2003년 태풍 매미 때 폭우에 밀려 해변으로 내려왔다. 구르지 않고 미끄러져 내려왔다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코로나로 사람 만나기가 꺼려지는 때다. 유배문학관에서 선소까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홀로 또는 두어 명 짝을 지어 답사해도 좋을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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