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곡석비군의 현재 모습. 대나무 숲에 가려지고, 철책으로 막혀 출입이 불가능하다. 네모 쳐진 부분이 지금 위치다
초곡석비군의 현재 모습. 대나무 숲에 가려지고, 철책으로 막혀 출입이 불가능하다. 네모 쳐진 부분이 지금 위치다
초곡석비군의 예전 모습. 앞쪽이 전원릉참봉김희조시혜비다
초곡석비군의 예전 모습. 앞쪽이 전원릉참봉김희조시혜비다

이동면 지역에는 유독 많은 금석문들이 산재해 있다. 얼추 중요한 것만 골라도 30여 점이 넘는다. 하나하나가 다 우리 남해의 역사와 변화를 되새겨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남해 사람들의 과거 삶이 한국사라는 지평에서 본다면 소소할지 몰라도 우리 남해로서는 귀중한 보석이다. 이런 역사 자료들을 잘 보존하고,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 남해의 역사를 기록할 때 곳간의 소중한 알곡을 꺼내 듯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이동면으로 들어서면 남해마늘연구소 도로 맞은편에 꽤 넓은 저수지가 보인다. 가뜩이나 물이 귀한 남해의 농토에 젖줄 같은 용수를 대주는 연못이다. 이름이 ‘장평소류지’다. 지금이야 저수지도 많아졌고, 지하수를 길어 농수로 쓰는 시대지만, 하늘만 보며 농사를 짓던 천수답(天水沓) 시절에는 저수지만큼 긴요한 시설은 없었다.

그런 장평소류지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2백년 세월 논밭을 적시다
장평소류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비석이 소류지 동쪽 제방 한가운데 서 있다. 이름하여 <초곡장평저수지류지기공비(草谷長評貯水池溜池起功碑)>다. 여기에 자세한 역사가 나온다.

장평소류지가 처음 조성된 때는 1807년(순조 7) 봄이다. 현령 채익영(蔡翼永)이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착공을 지시해 관개에 쓰도록 했다. 채익영은 1795년(정조 19)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한 것으로 나온다. 그때 저수지 크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자 토사가 쌓이고 물이 막혀 쓸모가 줄어들었다.

1914년 3월 준설 공사가 이뤄졌다. 군수 서기은(徐基殷)이 상황을 개탄하면서 소작인들을 동원해 돌을 캐어 제방을 쌓아 넓혔다. 서기은 군수는 1911년 2월부터 1914년 2월까지 재직했다. 7년 뒤인 1921년 5월 군수 성두식(成斗植, 1872-?)이 지방보조비 500원을 받아 수면을 넓히고 바닥을 파내 물길이 통하게 했다. 성두식은 일제 강점기의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 관료편에 수록되었다. 주민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평이 전하기는 한다.

다시 8년이 지나 1929년 군수 이필동(李珌東)이 부임해 보조금 850원을 받아 증수했고, 다음 해에는 도의원 임종길(林鍾吉)과 면장 정종묵(鄭鍾默)의 자문을 구해 보조금 5155원을 받아 대대적인 제방 공사를 펼쳤다. 이필동은 울산군수도 지냈고, 만주국에 가 관료로 있었으며, 역시 『친일인명사전』 에 올라 있다.

무림시장 입구 비석군에는 정종묵 씨의 <전성균관박사정종묵시혜비(前成均館博士鄭鍾默施惠碑)>가 있다.

1951년 전후해서 보강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공비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나오는데, 구민 이시봉(李時鳳) 등이 참여해 4월 6일부터 6월 20일까지 총 9천 평에 달하는 주변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시봉은 <부산일보> 1950년 1월 6일자에 전해 12월 30일 남해향교 명륜당에서 열린 유림회원대회(儒林會員大會)에서 사회를 봤던 것으로 나온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완 공사가 이어졌을 것인데, 지금 우리가 보는 소류지는 기원이 214년 전으로 올라가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의 저수지라 해도 이처럼 장구한 시간 많은 이들의 노력과 관심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기록은 손상되거나 감춰질 수 없다
장평소류지 기공과 보완 공사에 참여했던 이들의 공로를 남해 주민들은 잊지 않았다. 소류지에서 읍 쪽으로 30여 미터 내려온 길 오른편에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갈아 주민들은 그들의 공적이 지워지지 않게 했다.

바위에는 현령 채익영과 군수 서기은, 성두식, 직원 이시봉의 불망비(不忘碑)가 새겨져 있다. 서기은과 성두식 군수의 행적은 아쉽지만, 공은 공이다. 마애비 앞에는 소류지와는 관련이 없지만, <전원릉참봉김희조(金喜祚)시혜비>도 서 있다. 당연히 잘 관리되고 보전해 남해의 역사로 전해져야 한다.

기자가 마애비를 취재하기 위해 현장을 찾았을 때 육안으로는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높이 2미터, 폭이 3미터가 넘는 육중한 바위가 사라질 리 없어 뒤졌지만, 보이지 않아 난감했다. 어찌 된 영문인가?

마애비 앞을 지나는 국도 19호선은 얼마 전 확장공사를 마쳤다. 길이 넓혀지면서 불가피하게 이전하기에는 돌이 너무 컸다. 바위가 있을 만한 도로변에는 1미터 정도의 차단대가 쳐 있어 들어가 보기도 힘들었고, 또 대나무 숲이 우거져 진입도 어려웠다.

군청 문화관광과 신강호 학예사와 함께 다시 와 사방을 뒤진 끝에 마침내 마애비를 확인했다. 10여 미터 높이의 대나무 숲 안에 마애비와 시혜비는 갇혀 있었다.

당연히 공사 중에 보전하기는 했지만, 저렇게 철책을 치고 대나무로 울짱을 쳐 놓으면 누가 마애비가 있는 줄 알겠는가? 우리 군의 소중한 역사 유산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최소한 그 부분만이라도 철책을 걷고 대나무를 정리해 마애비가 군민들의 역사문화 탐방지로 되돌아오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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