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식​​​​​​​​​​​​​​역사문화관광자원봉사자
고영식
​​​​​​​역사문화관광자원봉사자

◆이충무공 후손들의 헌신

충렬사는 1658년에 사우가 중건되었는데 사우 관리를 위하여 1722년 서원이 개원되고, 지방 선비들이 맡아서 관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해마다 시설물을 수리할 일이 생기고 또 충렬사 경역 안팎을 가꾸고 부속건물을 더 지어야 하는 일이 생기니, 여기에 필요한 운영자금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장군의 후손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데, 실제로 1925년까지 약 200여 년간 5대손부터 11대손까지 7대가 참여하여 사재를 털어 가며 사우와 부속건물을 정성스럽게 보수 또는 신축 관리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공적을 살펴보면, 5대손 충민공 봉상은 본당을 비롯한 각종 시설물을 수축하고, 춘추 다례와 향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노은공 언상은 사당 곁에 ‘호충암’을 짓고, 화방사 승려로 하여금 사당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5대손 지사공 태상은 ‘청해루’(2층 문루)를 축성하였으며, 병사공 관상은 진교에 있는 논 100마지기를 매입하여 충렬사에 헌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6대손 퇴어공 한응은 비각을 중수하고 사당을 단청하였으며, 훈장공 한풍은 노비사숙과, 사우주변의 밭을 매입해 전나무, 소나무, 가래나무 등을 식재하므로 서 지금처럼 사당주변의 울창한 숲이 조성되게 하였다.

7대손 진주병사 건수는 문루를 중수하였다고 하며, 노은공 언상, 퇴어공 한응, 통상공 인수 등은 3대에 걸쳐 50여 년간 사우와 부속건물을 보수하고 관리하였으며, 도서지역의 어업권을 원에 예속시키고 어선 2척을 사들여 원에 예속시켰다.

11대손 민승은 비각을 중수하고, 5대손 명상은 충무공비를 건립하였으며, 10대손 규진, 11대손 민승은 비각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1925년 11대손 민봉은 의연금을 모금하여 강당과 문간 및 창고를 복건하였다. 

이 분들은 모두 무신들이었는데, 수군절도사 등 정3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었다. 

◆남해 충렬사의 수난과 재건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해충렬사가 수난기를 맞게 된다.

1871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난립한 서원들의 폐해가 극심하다며 전국에 산재한 650여 개소의 서원 중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사묘 등을 훼철시켰다. 서원, 사묘 철폐령에 따라 노량서원은 물론 남해충렬사까지 대상이 되어 비와 비각만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에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하며 이어온 역사가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우리 역사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치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주권을 잃어버린 일제하에서도 남해의 조상들은 충렬사를 복건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남해 충렬사가 훼철된 지 50년이 되는 1921년에 향토선비인 박진평, 정민주 두 어른이 비각을 헐고 다시 세웠다. 이듬해인 1922년에는 윤기섭, 고준홍 두 선비가 경비를 부담하여 사우 3칸을 신축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로서 충렬사가 재건된 것이며 오늘까지 존속하여 온 것이다.

1965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남해에 오셔서 충렬사에 참배하였다. 이날 ‘충렬사’, ‘보천욕일’, ‘이락사’, ‘대성운해’라는 친필 휘호를 하사하였는데, 현재 충렬사의 내삼문과 비각 그리고 이락사 사주문과 유허비각에 현판 되어 있다.

남해 충렬사 아래 노량 부둣가에는 2011년 사단법인 남해충렬사에서 충렬사 건립에 헌신하신 김여빈, 고승후, 그리고 윤기섭 선비의 영세불망비와 공적비를 세워 이분들의 공적을 선양하였다.

남해충렬사는 장군을 제향하는 불천위의 사우로 일 년에 탄신다례제와 기향제례 등 두 차례의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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