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식 역사문화관광자원봉사자
고영식
​​​​​​​역사문화관광자원봉사자

노량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충혼을 기리는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니던 소풍장소였으며, 그곳에 가면 으레 흰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쓴 연세 드신 영감님이 나와서 우리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토록 집례를 하시곤 했다.

그래서 충렬사는 나에게 친숙한 장소였으나 지금도 마찬가지로 충렬사에 가보면 장군의 모습과 주변 경관이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장군의 주검이 잠시 안치되었던 곳이어서 그러한가.

나는 이러한 장소의 인연으로 이순신을 마음으로 흠모하게 되었고, 담임선생님의 존경하는 인물의 설문조사에서는 단연 이순신이었다.

당시 나에게 가장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이순신의 모습은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말씀과 12척의 배로 왜놈들의 300척의 배와 싸워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이것보다 더 이순신의 업적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없다고 여겼고, 이때부터 이순신은 신출귀몰한 전술로 왜놈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위대한 존재로 나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몇 년 전 이순신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안 사실이지만 12척의 배가 도망자로 이름난 경상우수사 배설이란 자가 칠천량해전에서 싸우지 아니하고 도망쳐 나오면서 가지고 온 배였다고 한다.

이 12척이 주축이 되어 우리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을 이루고 이순신의 명예를 더 높게 했다니 참으로 역사란 이렇게 엮여 지기도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해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사적이 두 곳이 있다. 남해 충렬사와 이락사이다. 남해충렬사는 이락사 보다 204년 앞서 창사 되었다.

◆충렬사의 창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과 수많은 수군장병들이 전사하였다. 조명연합군 총사령관인 명나라 진린 도독이 전쟁이 끝나자 함대를 이끌고 이 곳 노량으로 와 수군장병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이틀간 충분한 휴식을 하게 하였다.

휴식이 끝나면 일본군의 잔적 소탕을 위하여 출전하게 되는 데 배안에 있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태우고 다니면서 작전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의 시신(영구)은 부득이 충렬사 터에 안치하였다.

어느 교수님 말씀과 같이 이때 판옥선에 모셔져 있던 수많은 수군장병들의 시신도 장군의 영구가 모셔져 있는 이곳 가까이에 안치 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린 장군이 수군함대를 지휘하며 왜적들의 소탕작전을 하는 사이 이순신장군의 영구는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는 고금도로 옮겼다.

장군이 순국하신지 30년 후인 1628년(인조 6년) 이 고장의 선비인 김여빈, 고승후 두 분이 장군의 시신이 임시로 안치되었던 장소에 터를 닦아 초당 한 칸을 세우고 장군의 위패를 모셨는데, 이것이 남해충렬사의 시초가 되었다.

김여빈 선비는 서면 서호리 사람으로, 자기 집에서 60여 리나 떨어진 노량까지 그 먼 거리를 하인들을 데리고 가 충렬사 초옥을 세우는 공사를 하였다. 고승후 선비는 노량에서 30여 리 떨어진 고현면 오곡리 사람으로 역시 가족과 머슴들을 데리고 가 건축공사비를 모금하거나 자담하며 땅의 정리와 잡역공사를 전담하였다고 한다. 당시 김여빈 선비는 혈기왕성한 32세의 젊은 이였으며, 고승후 어른은 66세인 초로의 선비였다.

초가집을 지어 놓고 보니 해마다 지붕을 다시 이어야 하고 세월이 가니 초당이 너무 좁고 초라하여 장군의 영혼을 편안하게 모시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두 어른이 나라에서 사우를 다시 지어 달라고 여러 차례 상소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1658년에 김여빈 선비가 경상도 관찰사에게 장문(狀文)을 갖추어 드리니 영남어사로 있던 민정중이란 분이 이를 전하여 듣고 통제사 정익(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 선생의 8대손)에게 명하여 사우를 개축토록하고 묘비(廟碑)를 세우라고 하였다.

통제사 정익이 초당을 헐고 새로 사우(祠宇)를 건립하였다. 남해충렬사가 창사 된지 30년 후의 일이다. 

사우(사당)가 완성되자 영남어사 민정중이 묘비건립을 위하여 당시 조정의 실세이고 학식이 풍부한 이조판서 송시열에게 비문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송시열이 글의 초안을 작성하게 되고, 홍명하라는 형조판서가 효종임금에게 이일을 아뢰게 되었다.

효종께서도 남해충렬사 사우개축과 묘비 건립에 대한 보고를 받고 매우 기뻐하시며, 송시열이 지은 묘비(廟碑)문안을 읽어 보신다음 극찬을 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1658년에는 충렬사 사우가 새로 마련되고, 1660년에는 비를 건립하게 되었으며, 1663년에는 비와 비각이 완성 되었다.

그런데 효종임금께서 1659년에 급환으로 승하하시게 되고, 그 해 조선 제18대 왕으로 현종임금이 즉위하였다. 현종임금도 김여빈, 고승후 두 분의 정성에 감응하여 1663년(현종5년) ‘충렬사(忠烈祠)’란 어필현액을 내리니 비로소 이 사우가 ‘충렬사’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충렬사 사우를 개축하고 주변 환경이 제대로 정비가 되었는데도 세월이 가면서 관리인이 없으니 무당이나 잡배들이 무상출입하여 장군의 영혼을 불편하게 하므로, 김여빈의 손자인 경리라는 사람이 세 차례에 걸쳐 임금에게 상소를 하였다.

사당을 더럽히는 무리들의 폐단을 금하여 줄 것과, 고을 선비들로 하여금 사당의 모든 일을 맡아서 관리토록하며, 달마다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에 분향하게 하여 달라고 간청을 한 것이다.

1721년 경종임금(장희빈의 아들)께서 소장 내용을 살피시고, 소장내용 대로 시행토록 예조에 명하셨다고 한다. 이리하여 사우를 수리하게 되고, 서원을 건립하였는데 서원의 이름을 ‘노량서원’이라 하였다. 노량서원은 이후 150년간 존속되었는데, 이 고장 선비들의 교육과 충렬사 관리에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김여빈, 고승후 두 어른이 나랏님으로부터 숭록대부와 가선대부라는 벼슬을 각각 받았다. 숭록대부는 종1품직으로, 요즘 대한민국의 관직으로 보면 ‘부총리’급이다. 가선대부는 종2품직이며, 차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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