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의 발전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남해문화원이 지난 4일 남해군향토역사연구원들과 함께 남해로 유배왔던 조선학자 소재 이이명 선생과 향토문화발전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한 향당 이청기 선생의 업적을 담은 ‘내 고장 역사 인물’ 현판식을 가졌다.

‘내 고장 역사 인물’ 현판식은 남해향토역사을 지키고 알리기 위해 해 마다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현판식을 통해 12명의 내 고장 역사인물 현판이 세워졌다.

문화원 이호균 원장은 “올 한해에는 군내에 있는 문화재들을 찾아보고 잘못된 점들은 바로잡아 향토역사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이이명

이이명(1658~1722)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본관은 전주, 호는 소재, 1680년(숙종6년) 23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까지 올랐으나 1689년(숙종 15년)기사사화로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1692년 남해로 귀양 온 장인 김만중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남해로 이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유배되어 강화도 유수로 발탁되지만 2년 후 형(兄) 사명(師命)의 죄를 변호하다 다시 고주로 유배당하기도 했다. 그 후 예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이조판서·병조판서·우의정에 올라 숙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면서 1708년 좌의정까지 오른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다.

특히 숙종의 죽음으로 고부사가 되어 연경에 갔을 때 독일·포르투갈 신부 등을 만나 교류하면서 천주교·천문·역산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돌아와 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1721년 경종(원년)이 영양군(영조)의 대리청정이 실현되려다가 실패하자 이를 주도한 김창집 등과 관직을 삭탈당하고 남해로 유배되어 있던 중 목호룡의 고변으로 이듬해 4월 서울로 압송, 사사(賜死)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을 엮은 ‘소재집’ 20권 10책이 전하고 ‘양역변통사의’와 ‘강역관계도설’ 등이 있다.

남해공용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봉천사 묘정비는 이이명의 사사소식을 들은 남해향사들이 봉천사를 세운 후 1828년 입석된 것으로 추정되며 군보호문화재 제3호이다.

이청기

이청기(1919~1994)는 고현면 대곡리 출신으로 본과는 장수, 호는 향당이다.

남해공립보통학교(제20회)를 졸업하고 일본 경도중학교, 일본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후 부산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하여 20여 년간 종사하면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위원, 영화윤리전국위원회 초대위원장, 공보부장관 자문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이화여대 강사, 주간 새마을 상임고문, 남해향토문화연구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9년 시나리오 ‘교차로’로 문단에 데뷔한 후 ‘서울의 휴일’ 등을 발표했고 저서로 ‘조국송갗, ‘사향록’, ‘남해도’ 등을 간행했다.

그의 저서 ‘사향록’은 문예작품은 아니지만 남해향토의 역사와 현실을 문학적, 학문적 접근 방법으로 연구해 그 전모를 밝혀 놓은 최초의 향토연구서로써 남해향토의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남해향토연구의 길잡이로써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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