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시대정신을 가진 유학자들이 타의에 의해 남해로 유배를 왔다면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워크홀릭(workaholic)들의 피난처이자 휴식처가 되어 유배를 자처하는 힐링아일랜드가 되었다. 

신이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을 선물했다면, 남해인들에게는 문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선물했다. 빼어난 자연경관과 인간이 만든 문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남해는 지혜롭게 발전해오고 있다. 

특히 남해로 온 유배객들은 남해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 유배객으로는 서포 김만중 선생이 있다. 서포 김만중 선생은 유배지 남해에서 “사씨남정기”를 집필했는데 이는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출하고 장희빈(張禧嬪)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에 대하여 비판하고, 숙종이 미혹됨을 깨닫고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쓴 폭로·풍간(諷諫) 소설이다. 이 소설 안에는 날카로운 저항 의식이 들어있다. 

천 리길 남해에서 창작한 사씨남정기는 구중궁궐 궁녀들과 한양 사대부 여인들이까지 읽은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김만중 선생이 한자가 아닌 한글로 소설을 쓴 것은 백성들에게 잘못된 것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시대정신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서포 김만중 선생의 정신문화적 자산이 우리의 문화와 정신에 잘 녹아있다. 

남해의 별호를 화전(花田)이라 한다. 화전이라는 별호는 남해만큼 남해인에게는 친숙한 단어다. 화전(花田)은 조선 중종 때 남해로 유배 온 자암 김구 선생이 창작한 경기체가 “화전별곡”에 의해 만들어졌다. 자암 김구 선생은 조선 4대 명필가이며, 31세 젊은 나이에 부제학이 되었지만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고 남해로 유배 온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다. 그리고 서포 김만중 선생, 자암 김구 선생 외에도 조선 후기의 왕족 출신이며, 노론 4대신의 한사람인 이이명(李頤命), 조선후기 예조참의, 의주부윤,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유의양(柳義養)등 다양한 계층의 유학자들이 남해로 유배 왔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과의 스캔들로 남해로 유배 온 궁녀 가야지는 왕자를 사랑한 죄로 유배 온 슬픈 러브스토리를 품은 유배객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사연을 가지고 온 유배객들을 따뜻하게 품은 것은 남해이며 남해 백성들이었다.  

남해대표 유배객인 서포 김만중 선생은 남해향교에서 주자어류를 빌려 완독하고 주자찬요를 엮으면서 남해향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백척간두에 서 있는 유배객이지만 자암 김구 선생은 남해를 시선의 섬이라 칭하며 극찬했다.  

필자는 유배객들이 학식과 풍류를 아는 낭만 유배객일거라는 상상과 함께 남해읍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문화축제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남해문화재야행 “남해섬에 유배를 자처하노라!”는 문화유산을 매개로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한 축제이며 지역의 특색있는 야간문화축제다.  

남해문화재야행 “남해섬에 유배를 자처하노라!”에는 낭만유배객의 스토리텔링이 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이 남해에 도착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향교일 것이다. 괴나리 봇짐을 메고 도착한 향교의 묵향을 맡으며 성균관에서의 추억을 회상할 것이다. 유배객들은 학문에 목말라했던 남해향교 장이들과 친분을 맺고 학문을 논한다. → 금강산도 식후경이라하여 낭만유배객들은 남해의 장이들과 함께 남해읍 전통시장에서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시 한 수를 읊는다. → 흥이 오른 낭만유배객은 고려시대 유배객과 함께 온 일곱 시녀들의 넋을 기린 칠선당에 잠시 쉬었다가 → 유배문학관으로 가는데 유배문학관에는 아름다운 여인과 양들이 자유로이 뛰어노는 판타지아 구운몽길이 유배객을 맞이한다. 남해문화재야행은 낭만유배객의 행보를 축제의 동선으로 만들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