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문태 청남동우회 회장
배문태 청남동우회 회장

청남선생은 1929년 10월3일(음력) 서면 계재골에서 태어나 향년 90세로 2018년 10월3일(양력) 서거했는데 음력과 양력이 10월3일 같은 날짜라 참 신기롭기도 했다. 생전에 청남선생은 말씀도 많지 않으셨고 생색내실 줄도 모르는 전형적인 무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경호차장으로 재직할 때 억지로 떠밀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고 득표율로 당선된 후 제일 먼저 노량바다에 다리교각 4개가 우뚝 선채 중단돼 있던 공사를 속개하기 위해 예산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남해각 휴게소 건립, 노량 충렬사와 이락사간 도로 확포장공사, 가로수 벚꽃나무 식수, 충렬사와 이락사 단장이 시급했다. 이어 남해 일주도로 건설, 축항 개보수, 저수지 건립, 다초 아열대식물연구소 건립, 각 마을회관 개보수에 필요한 시멘트 지원 등 새마을운동을 독려하며 예산을 확보하는 일에 동분서주 했다. 

특히 전기전화사업은 농어촌지역 중에서는 진주시보다 먼저 직통전화를 개통토록 하였고 또 당시 남해에 상업고등학교가 없다는 고현면민들의 탄원에 따라 탑동에 건립부지를 확보한 후 관계기관에 긴급예산을 편성토록 요구하여 준공 및 개교토록 하였고, 졸업생 전원을 취업알선과 동시에 고향후배들의 취업, 승진, 전보 등에 이르기까지 전력을 투구하며 1971년부터 1979년까지 남해·하동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던 모습이 이 순간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남해대교 건설도 기(起)승(承)전(轉)결(結) 과정을 거치며 준공되었는데 남해대교 건설의 기(起)는 신동관 청와대 경호과장 때 일어난다. 그 당시 낙도였던 남해섬에 다리를 놓게 지시한 박정희 대통령, 대교 건설의 주역이신 고(故)최치환 의원, 고(故) 신동관 의원께 군민들은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해대교 건설의 발단은 1964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이 하기 휴가차 가족동반 진해 저도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있을 때 대통령 내외분을 맞이하려고 미리 도착해 있던 당시 국방장관(김성은), 해군참모총장(이맹기 제독), 해군 제2 함대사령관(장지수 제독) 등이 대통령을 수행한 신동관 경호과장과 마주하게 된다. 

이 분들이 신동관 경호과장을 만나자 대통령을 경호하며 고생이 많다고 격려하며 대통령이 체류하는 동안 고향이나 다녀오도록 각하께 건의하겠다고 하자 신동관 경호과장은 고향에 다녀오고 싶지만 기상상태를 예측할 수 없어 안 된다면서 남해섬 출신들이 기상악화로 뱃길이 끊기면 육지로 가지 못해 고통스러워 다리 하나 놓는 것이 내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해군수뇌부는 그날 밤 만찬장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제2 함대사령관 장지수 제독이 “각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도 성공리에 진행되고 있으니 이제는 각 도서지방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 대간첩작전상 어려움을 해소하는 일이 시급합니다”면서 “지금 남해섬의 앵강만과 미조항 해안등지에 북괴간첩선이 자주 침투해 간첩소탕작전상 애로가 많으니 남해-하동을 연결하는 다리를 하나 놓아 주십시오”라고 고향도 못가는 신동관 과장의 말을 인용하며 진언했다.

당시 남해섬은 간첩선이 자주 출현하여 간첩소탕작전상 취약지구였고 남해군민들의 숙원인데다 신동관 경호과장의 소원이란 말을 묵묵히 경청하시던 박 대통령은 즉시 건설부장관(장예준)에게 남해대교 건설계획을 수립해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이 남해대교건설의 발단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남해대교 건설의 기(起)는 당시 신동관 경호과장에 의해, 승(承)전(轉)은 최치환 의원에 의해, 결(結)은 신동관 의원으로 이어지며 총공사비 21억2000여만원을 투입해 착공 6년만인 1973년 6월22일 남해대교가 준공된다. 청남선생은 남해대교준공 후 대중교통망 확충을 위해 남흥, 경남여객이 시외버스 신설허가를 받도록 조치해 전국 각지를 운행하며 남해관광시대의 문을 활짝 열게 한 분이다.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고향에 남겨놓은 업적 하나하나를 새삼스럽게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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