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노도가 보인다. 그 섬을 휘감은 푸른 빛의 앵강만. 언제 봐도 오묘한 그 물빛을 담아 휘감아 드는 갯바람. 그 아름다운 비경을 배경으로 두 이가 마주 앉았다.

남해사람보다 더 남해를 사랑하는 ‘길과 함께 한 여자’ 여행작가 김인자 씨와 ‘길 위의 남자’ 남면 바래길 다랭이지겟길 바래지기 백상연 씨가 마주 앉아 ‘길’ 이야기를 나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길’, 그 길 속에 녹아있는 남해 이야기를 나눈다.

조성 기본계획 발표 후 다시 남해 바래길이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지금 당장 관광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길이라면, 그 모든 준비가 끝났다면 좋으련만 바래길은 그냥 ‘고속도로’처럼 뚫어 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래서 바래길에 관심있는 이, 그 길에 많은 것들을 녹이고 싶어 하는 이들은 ‘빠르지 않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바래길’ 그 이름 속 숨은 뜻처럼 어머니가 ‘바래’하듯 꿈을 담고 바람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 대다수의 의견이다.

그의 평생을 길과 함께 한 여행작가 김인자 씨, 그리고 20년 넘게 고향 산길, 바닷길, 논길을 발로 디디며 오늘의 바래길, 미래의 바래길을 꿈꿔온 바래지기 백상연 씨 두 사람의 ‘길’ 이야기. 남해 바래길은 어떤 모습, 어떤 길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두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면에 옮겨 담아본다. <편집자주>

▶‘벤츠’타고 와서 걷는 사람은 없다

▲ "사람내음 없는, 삶이 없는 길. 그 길은 ‘불행한 길’이다” - 여행작가 김인자
사실 여행작가 김인자 씨의 수없이 많은 남해 여행 중 이번은 ‘여행을 위한 방문’이 아니었다. 지난 주말 열린 ‘보물섬독서학교 개교식’ 특강 강사로 초빙돼 강연을 위해 멀리 경기도에서 한달음에 달려 내려온 그녀. 평생 길과 함께 했던 그녀가 길을 외면할 수 있었을까. 특강이 끝난 뒤 상주 바래길을, 그리고 이튿날은 남면 다랭이지겟길을 걸쳐 걸은 뒤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바래길 이야기는 ‘지적’이 많았고 ‘아쉬움’이 많았다. 걷는 것에는 도가 통한 그녀에게도 남면 다랭이지겟길 코스는 다소 힘들었단다. 그 힘듦을 덜어줄 ‘소박한 쉼터’가 준비되지 않은 길은 그녀에게 아쉬움이었다.

그녀의 걸음으로 7시간, 그 시간동안 걷기 위해 온 이들의 허기를 채워줄 무엇인가는 ‘진수성찬’이 아니라는 것, 김치 툭 얹어 말아먹는 국수 한 그릇, 심지어 시원한 물 한 모금이라도 좋으니 “가난한 여행자들을 위한 소박한 쉼터 하나쯤은 있었으면 한다. 벤츠타고 와서 걷는 사람 없지 않느냐”는 것이 그녀의 말이었다.

밤에도 아름다운 남해의 비경에 취해 잠도 안자고 돌아다닐 정도로 남해를 사랑한다는 김 씨도 이런 아쉬움에서 “남해여행은 그래서 아직은 ‘부르주아 여행’”이라 했다.

▶새롭게 만들 필요는 없다! 있는 것을 활용할 뿐…

김인자 씨의 아쉬움 토로에 바래지기 백상연 씨가 말을 받는다. 잘 지어진 마을회관, 남면 다랭이지겟길만 국한해 보자면 사촌, 가천 등의 마을민박이 김인자 씨의 지적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백 씨의 말이다.

개통은 됐지만 아직도 ‘길 다듬기’가 진행 중인 다랭이지겟길 코스 중 “사촌해수욕장 인근 민박집에서는 팜스테이 형태의 숙박이 많지는 않지만 간간이 이뤄지고 있다”는 백 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을회관에서는 단체 방문객이 머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와 ‘나홀로걷기족’을 위한 캡슐형 숙박시설 등을 준비하는 것, ‘가난한 여행자’들을 위한 좋은 배려가 될 것이라 했다.

▲ “아름다운 경치에 아름다운 사람이 걷는 길, 바래길” - 바래지기 백상연
캡슐형 숙박시설은 개인을 위한 공간이긴 하지만 하루의 여독을 잠시나마 씻어낼 수 있는 샤워시설과 화장실 등은 공동으로 사용케 하고 적어도 2만원은 넘지않는 숙박료에 하루의 편한 잠자리를 제공받고 웹 문화와 스마트폰 등 모바일 문화에 익숙한 젊은 층의 편의를 위한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준비된다. 자연스레 이 공간에서 그 날 바래길을 걸으며 느꼈던 점들과 그들 각자 나름의 이야기는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를 타고 아직 바래길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 전해진다.

▲페루 잉카트레일, 북유럽의 길에서 바래길을…

이들의 대화는 빠르지 않았다. 사실 기자의 뒤이은 취재 스케줄만 아니었다면 그 대화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정도로 깊었고 느렸다. 자동차 이야기가 아닌 ‘걸음’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더 느렸던 이야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백상연 씨와 김인자 씨의 한결같은 ‘길’에 대한 생각은 ‘사람’, 그리고 ‘삶’이었다. 남해의 바래길은 ‘사람’이 중심이어야 되며 이 길을 항상 끼고 사는 ‘우리네 삶’이어야 된다는 이야기었다. 세계 100개국 이상을 다닌 여행작가 김인자 씨는 페루의 ‘잉카트레일’과 북유럽을 예로 들어 이야기했다.

페루의 잉카트레일이 유명한 이유는 고대문명의 흔적을 따라 걷는 매력도 있지만 그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쉬는 잉카원주민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 했고, 북유럽과 뉴질랜드에서는 길 곁 아무도 지키는 이 없이 가격과 개수만 달랑 적힌 푯말만이 지나는 이를 반기는 오렌지더미, 그 오렌지를 쌓아 놓고 저 안쪽 농장에서 지나던 이들이 건네는 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네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 때문에 매력적이라 했다.

이 모습을 남해에 그대로 옮기자면 바래길을 따라 걷는 중 시금치밭 한 켠에서 열심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남해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이고 마을 안 길을 따라 걷다 놓인 시금치더미, 마늘더미…. 그리고 그 안쪽에서 시금치를 다듬고 마늘을 더듬는 우리 남해사람들을 볼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이에게는 퉁명하게 보일 수 있는 ‘남해사람’들의 이타적인 마음을 걱정했다. 들여다보면 들녘에서 새참을 먹을 때도 혼자 먹는 법이 없을 정도로 마음씀씀이 넉넉한 남해사람들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이에게는 참 차가운 사람들도 남해사람들이다.

사실 시금치 다듬느라 바쁜데 화장실 쓰겠다고 들락날락거리는 이들이 반가울 사람이 있으랴. 그렇지만 바래길이 유명해져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겠다고 찾아오면 이 ‘속내 따스운 이들’의 알게 모르게 내비칠 ‘차가움’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리고 ‘견물생심’이라고 지나던 이들이 한창 자라는 마늘을 재미삼아 한 두 개 뽑기라도 한다면…. 걷는 이들에게도 ‘성숙함’이 필요하겠지만 이 ‘만약’을 어느 선까지 얼마나 참아낼 수 있는 ‘관대함’을 우리들이 갖출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고민이었다.

▲ 남해 바래길 지도가 그려진 손수건 위에 김인자 씨가 읽고 있는 ‘인도방랑’이란 책. 두 사람이 진중한 대화를 나누는 도중 신비로움으로 대변되는, 많은 여행마니아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손꼽는 ‘인도’처럼 남해의 바래길도 그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또 다시 ‘느림’이고 그래서 ‘사람’이다

“사람의 삶을 배제하고는 아름다운 길은 없다”, 김인자 씨의 말이다. 그 아름다운 길을 만드는데 김 씨와 백 씨가 다시 교집합을 이룬 부분이 ‘사람’이고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변치 않는 절대적 고집’이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자연을 따라 걷되 사람이 중심이 된, 그리고 그 사람에게 다시 뭔가를 돌려줄 수 있는 길을 만들어보겠다는 고집’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 ‘고집’을 이어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될 것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올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냥 고속도로 닦는 일이 아닌, 그냥 쭉쭉 돈 들여 데크 깔아내고 벤치 놓아 뚫어내는 길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잇는 ‘길’을 만드는 것이기에 더욱 더 그럴 거라는.

김인자 작가가 남해를 사랑하는 큰 이유 중 하나인 ‘너무 묻혀있어서 숨막힐 것만 같은 적막감’에 쌓인 이 곳 사람들도 지나는 이들이 툭 건네는 말 한마디에 반가워하는 북유럽 오렌지 농장사람들처럼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며 바라고 고민하는 두 사람이다. 이타심이라곤 없는 북유럽의 그네들처럼 ‘길’을 통해 얻는 것에 만족하고 어느 쯤은 내어줄 줄 아는 마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좋아 이 길을 찾고 다시 이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걷는 이들의 마음이 녹은 길, 그런 길을 만드는데 ‘너와 나’, ‘민관(民官)’의 구분은 없어야 된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다. ‘절대로 같이’를 강조했던 김인자 씨의 말, 빠르면 닫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에 또다시 ‘느림’이다. 남해의 바래길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잇는 길’이다. 그 준비는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또 이어가는 느림’이어야 한다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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