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숙종 때에 정소사(召史?성씨 다음에 붙여 과부를 높여 부르는 말)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열녀비각이 있어 생겨난 이름이다.
삼동면 영지마을에 있다.
설천면 어느 마을에 살던 정씨 성을 가진 아름다운 아가씨가 삼동면 영지마을의 김정려라는 양반 가문 총각에게 시집을 왔다.
아기자기한 신혼의 단꿈도 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남편 김씨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때부터 정씨부인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좋다는 약이나 음식은 무엇이든지 구해다 간호를 다하였으나 뚜렷한 효험을 보지 못하게 되고 차차 쇠약해져서 마침내 남편의 목숨은 죽음 직전에 이르고 말았다.
정씨 부인은 마지막 결심을 하고 마침내 자신의 열 손가락을 모두 깨물어 남편의 입속에 피를 흘려 넣었으나 별다른 효험을 보지 못하고 3일만에 남편은 눈을 감고 말았다.
정씨 부인은 마을 뒤편에 남편을 장사 지내고 무덤 옆에 움막을 지어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하루 세끼, 끼니 때 마다 따뜻한 음식을 정성스레 차려 올리는 등 예의와 범절이 남편이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드디어 3년 동안의 시묘살이가 끝났다.
시묘살이를 마치자 정여인의 시집 부모들은 젊은 며느리의 처지가 너무나 안타깝고 장래를 생각해서 개가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친정 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씨부인은 끝내 거절하며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더구나 자기의 결심이 변하거나 허물어졌을 때 언제라도 자결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다지고 품속에 항상 은장도를 품고 다녔다.
삼동 영지 열녀문골의 열녀각 비분을 여기 옮겨 적어 본다.
-열녀 정씨는 본관이 진주이다. 그 남편이 죽음에 이르자 칼로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입속으로 흘려넣었으나 소생하지 못했다. 빈소를 마련하고 거적자리에 엎드려 아침저녁 밥상을 바치는 일이 생전과 한치도 다름이 없었다.
언제나 남장을 하고 품속에 칼을 지니고 다녔는데 죽음을 각오한 그 마음이 추상같았다.
숙종 8년(1681년)에 어사 이사영(李思永)이 이 곳에 와서 이런 사실을 듣고 조정에 아뢰어 정려(旌閭)를 짓도록 하였다.
철종 9년(1858)에 현령 이용주(李容株?1857~1858)가 퇴락한 정문을 다시 중수 하였다.
우리 지역에는 이 곳 말고도 열녀문이 한 군데 더 있다.
남해읍 평현리에 있는 열녀문이 그 곳인데 지명으로는 고착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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