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남해인물사 - 4
20세기 남해인물사 - 4
  • 남해신문
  • 승인 2008.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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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淮菴) 하준천(河準千 1897 - 1963)

▲ 회암 하준천
역사는 기록에서부터 시작하고 이를 근거로 정립되기 때문에 당시의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헌적 근거자료가 될 수 있다. 이를 알면서도 기록의 소홀함으로 인하며 인간 개인의 중요한 역사적 기록들을 누락시켜 후대 후손들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충분한 물적자료를 확보하지 못하고 정설을 파악하지 못한 채 왜곡되는 일들이 수없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역사 왜곡을 바로 잡고, 올바른 역사적 자료를 마련하고 알리기 위해 남해역사연구회(회장 정의연)에서 2008년도 중점 사업 중 하나로 ‘20세기 남해인물사 편찬사업’을 마련했다.

‘20세기 남해인물사 편찬사업’은 남해역사연구회 주최, 20세기 남해인물사연구소 주관, 남해신문과 향우회가 후원하며 1900년대에 활동한 남해출신 인물을 중심으로 편찬된다. 이에 따라 ‘20세기 남해인물사’에 수록된 인물들을 매주 한명씩 본지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생애

회암 하준천 선생은 1897년 11월 1일 남해군 고현면 포상리 천동마을에서 부친 하일청(河一淸)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는데 입남조 신(紳. 남해현령. 1437년 入南海)으로부터 18세손이고 장남은 하준호로서 3.1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선생은 1913년에 남해 집영(集英)학교를 수료하였고 남달리 애국심이 강했으며, 조국광복을 위해 걱정하시다가 독립당을 찾아간다는 곳이 천도교를 직접 찾아가 1914년 5월 25일 17세의 나이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진주 대교구의 영도자이신 묵암 신용구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한편 1916년에 진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에 사천군 서포 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직에 몸을 담기 시작하였다. 교직에 있으면서 묵암선생의 지도를 받아 1918년에 천도교 남해 전교실을 창립하였고 조국광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3.1독립운동을 위해 동지를 규합코자 설천면의 윤도청, 윤병호, 정상기, 정훈도, 정재모 등과 밀의를 거듭하였고, 삼동면의 김일문, 하상근과 남해읍의 문창일, 김성준, 강한문, 박경수 등과는 긴밀한 연락으로 광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9월에는 남해청년회를 조직하여 독립정신을 함양하던 중 불온 사상자로 지목되어 교직이 면직되었다. 1920년에는 설천보통학교에 다시 취임하여 1923년에 학생들에게 조국의 혼을 불어넣기 위해 “학도갚를 작사 작곡하여 부르도록 하였다.

1931년에 교직을 그만두고 남해 노량에 있는 집에서 양조장 사업을 시작하였다. 1932년 2월에 천도교 청우당 남해군 대표로 활약하였고 1937년에 이어리에 있는 천도교 종리원을 설천면 비란리로 이전하고 남해교구로 승격됨에 따라 초대 교구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1940년에 노량리 덕신마을에 덕신국민학교를 설립하여 지방교육에도 헌신하였다.

회암 선생은 3.1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종교지도자로서, 교육자로서 일생을 보내다가 1963년 2월 11일 향년 66세의 일기로 환원하였다.

3.1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활동

우선 먼저 남해 3.1독립운동 발상지 설천면 문항리 솔곳등에 세워져 있는 발상기념비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 당하고 그 포악무도한 압정에 시달리던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순식간에 거족적인 항일 투쟁으로 발전되었다. 그때 총성은 천지를 울렸고 강산은 피로 물들어 갔건만 설천 사람들은 이를 겁내지 않고 이 고을에서 맨 먼저 애국의 횃불을 들었다.

그해 4월 2일 이예모의 선도로 정갑린, 정상기, 하준천의 권면으로 하준호, 정순조, 정흥조, 정임춘, 류찬숙, 윤주순, 정학순, 정익주, 정재모, 정몽호, 이찬덕, 윤희도, 양재문, 류봉순, 문한조, 정두기, 정남섭 등 많은 설천면민이 남양, 금음, 문항,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4월 4일에는 남해읍 장터로 가서 김희조, 박경수, 강한문, 정용교, 하상근, 원복상, 정학순 등과 합세하여 태극기를 들고 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른 뒤 군청, 경찰서, 주재소 외 각 기관을 점거하고 자주독립을 외쳤다.

이로 인해 일제 통치는 빛을 잃었고 고을에서는 연달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통분하게도 이 중 23명은 일경에 붙잡혀가서 1년 내지 3년간의 모진 옥고를 치렀고 마침내 정학순은 순국까지 하였다.

장하다. 그 충절 조국으로 되찾고자 죽음으로 항거한 그 공로를 우리 어찌 잊으랴. 그로부터 67년 나라의 사업으로 여기에 비를 세우는 뜻은 님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강토를 길이 지키자 함이니 다시는 남의 침략을 받지 않도록 굳게 뭉쳐 힘을 기르자. /1985년 문신수가 글을 짓고 이성숙이 글씨를 쓰다 남해군수 세움

3.1독립운동은 천도교에서 주도하였기 때문에 천도교 교역자라면 당연히 참여하게 되었고 조국 광복을 위해 동지들의 규합과 권면으로 지도하였다. 당시 의암 손병희 선생께서 전국 천도교 교인에게 천도교 중앙 대교당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성금을 모았을 때 회암 선생은 10원(현재 논 한마지기 금액)을 내었다. 모아진 성금의 일부는 중앙총부 건물 건립에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3.1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애국심이 남달리 열렬했던 회암 하준천 선생은 강직한 성격으로 의분심도 강하여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였다. 한일합방으로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고 항일 구국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회암은 종교인으로서 조국 광복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종교지도자로서의 활동

회암 하준천 선생은 1914년에 천도교에 자진하여 입도하였다. 입도를 하게 된 동기는 조국 광복을 위해 여러 단체나 기관을 찾아 다녔으나 찾지를 못하고 독립당을 찾는다는 것이 천도교였다. 천도교에 입도하여 진주에 있는 대교구의 지도자이신 묵암 신용구(1883-1967)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수도에 전념하였다.

천도교의 교세가 어려움에도 묵암 선생의 탁월한 지도아래 차츰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1923년 고현면 이어리에 천도교 남해군 종리원을 설립하고 중암 정재모(3.1독립유공자)선생을 종리원장으로 추대한 후 선생은 포덕에 주력하는 한편 진주 대교구의 서기원, 청년회 지육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계속하여 남해에서 포덕에 주력할 때 남해군 고현보통학교 교사로 발령되어 부임하였고 교회직책으로는 남해군 포덕사, 종리사, 종리원 감사 등을 1930년까지 수행하던 중 회암 선생의 행동에 대한 불만과 조국 광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을 눈치 챈 일정에서는 남해와 동떨어진 고성군 하일보통학교로 발령을 내렸다. 회암 선생은 후세의 교육도 걱정이 되었지만 현실이 급급함으로 권고사직을 받아들여 교직을 34세 때인 1931년에 퇴임하였다. 1932년 이후 회암 선생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천도교 교직으로는 1932년에 천도교 청우당 남해군 대표, 신훈, 1933년에 천도교 남해군교구장, 교훈, 1934년에 도훈, 1935년에 회암(淮菴)도첩 받음, 금사 도첩 받음. 1939년에 도사, 1944년 종법사, 1956년에 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이 되자 한사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원근을 불구하고 가가호호를 찾아 다녔고 우리의 생활을 더욱 윤택 시키고 안정시키기 위해 식산계를 창설하여 교회와 가정에 재정적인 뒷받침이 되는데 활력소가 되었다. 농업에 있어서는 농민들의 많은 수확을 위하여 농약을 살포해야 된다고 호소하는 한편 박하 기름을 생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던 중 1959년 천도교 10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1월 1일에 남해교당에서 연두사를 하였다. 그 내용 중에 “한울님의 복록을 내 힘으로 챙겨 살자 노고근면 아니하고 남의 생활 부러워 말라 윤리가 끊어지면 부자형제 간곳없고 윤리를 살려서 인간답게 살아보자”라고 말씀하시고 “치세는 현자를 친근하고 악자를 경언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도교를 신앙하는데는 수도의 요령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1960년에 천도입문, 참회문, 내성단서사, 소년의서사를 직접 짓고 교인에게 한울님을 잊지 말고 수도에 전념하라 하였다.

교육자로서의 활동

회암 선생은 1916년에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에 사천군에 있는 서포보통학교 교사로 교직생활을 시작하여 1920년에 남해 설천보통학교 1928년에 남해 고현보통학교 1931년에 고성군 하일보통학교에서 후학들을 위하여 근무하였다.

특히, 1940년에는 남해 덕신초등학교를 설치 및 건립에 주역이 되어 향토 지역 교육의 장을 만들었다.

설천보통학교 재직시 학생들에게 조국의 혼을 불러 넣기 위해 “학도갚를 작사 작곡하였다. 내용으로는 “화려강산, 동반도는 우리의 조국이요, 단군자손 배달족은 우리의 동포이다. 학도들아 형제들아 깊이 맹세하자 사천년 역사국을 영원히 빛내세 애국애족 인간평등 우리의 갈길이요 동심동덕 신학문이 우리의 할 일이다. 학도들아 형제들아 배우고 익히자 문명개화 독립국을 알뜰히 지키세” 이것을 볼 때 회암 선생의 애국심은 남달랐다는 것으로 보아진다. 그리고 지역 교육을 위하여 덕신마을 유지들과 의논한 결과 덕신초등학교를 건립하였다. 이에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학교 교정에 후학들이 공적비를 세웠다.

공적비(功蹟碑) 회암 하준천

(淮菴 河準千) 1897 - 1963

선생께서는 포상리에서 출생하시어 진농3기(1917)로서 학생시에 천도교에 입교(포덕 38년 1914년)하시어 인내천의 종지를 받들어 70평생을 수도와 포덕에 전심전력, 도사, 종법사 도정, 선도사 등의 도첩을 배수(拜受)하셨으며 3.1독립운동 남해 발상을 선도(부산 경남 3.1운동사에 수록 및 남해 발상 비문에 새겨져 있음)하고 “학도갚를 창작, 학생들에게 읽혀 애국심을 고취하는 등 구국운동에 선봉 암약(暗躍)하다가 일경에 노출되어 고문을 당하고 교사직(1918-1926)을 박탈(剝奪)당하셨다. 이어 노량리에 정착(1930)하고 포덕에 주력 30여년간(1933-1962) 천도교 남해군 교구장을 역임 무려 1,200여 도호를 포덕하고 수도요제를 창작 수천의 후학을 양성하는 등 교리 전반에 기여한바 공이 지대하셨다. 1941년 일본 헌병이 몰려와 노량충렬사를 파괴(현 충렬사비문에 당시의 총흔이 있음)하고 민족혼을 말살하려하자 결사반대 운동을 전개 보존하는데 성공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 지방교육을 위하여 덕신국민학교를 건립(1940)하는데 주역을 하였으므로 본교 교정에 유공비가 세워져 있다. 8.15해방을 맞아 건국과 더불어 활기찬 포덕으로 수많은 민생을 구출하시고 아울러 사회봉사와 농촌계몽 및 광제창생을 몸소 실천 시범하여 애국애족자로서 도성덕립 하신 남해가 낳은 유일한 성자라고들 하였으니 이제 여기에 선생의 공적의 일단을 새겨 영세불망토록 전하고자 하느니라. /포덕131년(1990) 10월 후학일동심고

회암 하준천선생 묘비문

회암 선생은 3.1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천도교 교역자로서, 또는 교육자로서 어떻게 하면 현실에 즈음하여 교도 교육하여 살기 좋은 남해를 만들기 위해 성심성력을 다하여 일생을 바쳤다. 마지막으로 남해군 고현면 포상리 달실에 있는 묘비문을 소개하겠다.

선생은 포덕 38년(서기1897) 11월 1일 남해군 고현면 포상리 하일청씨의 차남으로 뛰어난 천품과 재질을 타고 나셨다. 어머님을 여의시니 인생의 허무와 당시 국운의 일비를 느끼시고 인생의 본질과 구국의 길을 찾아 인내천의 종지아래 보국안민, 광제창생, 포덕천하의 큰 이상을 가진 천도교에 입교하셨다. 그 후 독립운동에 참가 일제의 지탄으로 교원직을 사퇴하셨고 50여년을 하루같이 즐풍폭우 수수산산을 발섭 동지를 찾고 찾아 포덕과 교화로써 신앙의 핵심이 찬 금사 옥사로 다듬어 주시고 시운시변에 따른 시대교화에 주력하실제 명명한 새 운수를 바로 받도록 소년의서사, 내성단서사, 참회문 등을 성문화하여 설법하시니 탁월한 교화력은 무왕불복의 운이 남해 전도를 감돌고 독신교인 수천호를 마치 천도교 왕국을 방불케 하였으니 천명의 냉엄이여! 포덕 104년 2월 11일 66세의 일기로 환원하시니 묵암 신용구 선생은 공문에 안연의 죽음을 회상케 하셨다. 우리는 용담 연원의 후천 새 운수가 저 바닷물처럼 억만년 무궁토록 연면히 흐를 것을 믿고 천덕사은을 길이 빛내고자 유서 깊은 노량 뒷산 선생의 묘소에 이 비를 세우다. /포덕 115년 5월 25일 회암 하준천선생 묘비건립위원회 삼가 세움

<글·남해역사연구회 20세기 남해인물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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