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앵강만에 밤이 왔다. 앵강만의 밤이 도둑처럼 아니 치맛자락을 살살 끌며 걷는 새색시 걸음처럼 내리고 나면 단숨에 금산을 뛰어오른 만월이 두둥실 바다에 길을 내며 떠오른다. 건너 노도에도 하나 둘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앵강만에는 야밤에도 작은 불을 켠 배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다음 날 아침에 거둘 그물을 던지러 온 모양이다. 그러나 그 불빛도 이내 바다 가운데서 긴 그림자를 지우며 육지로 이동하고 있다. 숙소 앞 간이의자에 앉아 달빛 속 적막에 든 앵강만을 바라보는 일은 소름 돋도록 뭉클하다. 세상의 평화가 모두 이곳에 모인 듯 넉넉해지는 밤이다.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낙원이 또 어디에 있었던가?
첫날밤은 바다와, 둘째 날은 보름달과, 셋째 날은 바람소리와 해후를 했다. 고요가 집을 짓는다.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바람, 멀리서 간간이 개 짖는 소리와 밤새도록 해변에 달려와 안기는 파도소리가 그리움의 집을 짓는 월포 포구,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일수록 파도는 몸을 열고 더 환하게 깨어있다. 갯바위에 부딪혀 쓸리는 파도소리와 여기저기서 다투듯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가 고요를 더욱 고요답게 한다.

 

 

앵강만에서 바로본 월포 언덕

 

앵강만에서의 시간들

건너 마을 금평, 원천, 벽련에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서른 개쯤의 불빛들은 늦은 밤이 되자 다시 하나 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 불빛 속에는 몇 명의 가족들이 아랫목에 등을 기대고 살까? 불빛은 거의 일렬 횡대로 줄을 맞추고 있다. 가끔 마을 끝에서 미끄러지듯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가 바다를 가로질러 오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한다. 붉은 색 네온은 한 여름 도시의 사람들을 받아 바쁘게 보낸 숙박업소거나 음식점 간판일 것이다. 불빛이 미끄러져 월포 방향으로 올 때는 그게 누구든 막연한 기다림이 동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노도의 불빛은 정확히 10개다. 그 중 8개는 가로등이고 나머지 2개는 민가의 불빛 같다.
걷는다. 월포의 밤 언덕을, 밝은 달 아래, 산 너머로 별똥별이 길게 떨어진다. 뒷산 8부 능선쯤 작은 불빛 하나가 반짝거린다. 산 속의 작은 암자거나 민가일 것이다. 저 불빛이 밤새 보는 건 바다말고 또 무엇이 있는지 나 같은 과객은 알 수 없다.  
바다 속에 뜬 달에 취해 있을 때 뭔가 발등을 건드렸다. 깜짝 놀라 아래를 보니 청개구리다. 놀라서 발을 움직일 때 바닥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다. 혼자 있다는 걸 알고 놀아주려는 것인지 한동안 개구리는 꼼짝 않고 내 발 밑을 지키다가 달빛 속 그의 처소로 돌아갔다.

 
 

도로에서 벼를 말리고 있는 할머니.

 


나를 만나는 시간

홀로 걷는 달밤이 숨막히는 것은 세상이 너무나 창백하고 고요하기 때문이지만, 그보다   정직한 나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이유로 매력 있는 시간이다. 나는 잊고 있던 내 자신과 조용히 해후하고 싶을 때 남해를 찾아 그 품에 안겨 산과 바다를 본다. 금산의 새벽은 어떻게 오며 노도의 밤은 어떻게 내리는지, 남해에 머무는 동안만은  번잡한 저잣거리의 속도를 잊고 비로소 느리게 걸어가는 시간의 바다에 나를 풀어놓고 평화로운 휴식을 갖는다.

 
 

바닷바람으로 익어 가는 조

 
  남해, 앵강만이 내려다보이는/월포 언덕 위 오막살이 집 하나/애초, 아무 것도 내 것이 아니었던 그것/그러나 잠시 내 것이었다네/1박에 4만원 일수로 빌려 소유했다네

휴식이란, 빈 의자 등받이에/세상의 찌든 때를 닦던/푸른 수건 하나 걸어두고/유유자적 바라보는 일에 불과하지만

동터오는 새벽이나 해질 무렵/잘 익은 와인 한 병과 아껴 읽던 시집과/손 뜨게 질 하던 스웨터나 통기타를 곁에 두고/언젠가 만선의 황포돛배로/목이 터져라 내 이름 부르며/그 언덕으로 돌아올 그대를/기다리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네

그러나 다시 나의 휴식은/빈 의자를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그 뿐이었다네/비워 둔 의자에 마음 심는 일이/얼마나 사무치는 일인지/오래 전 그대의 손을 잡고/매기의 추억을 노래하던 그것 외에/아무 것도 생각나는 게 없던/그 날 그 언덕/이제 다시 그리움으로 되돌아가고 싶은/오막살이 집 앞 빈 의자 하나

詩 <쓸쓸한 휴식> 全文.

 

/글·사진 김인자(시인·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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