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日帝)의 지명 약탈(掠奪)
일제(日帝)의 지명 약탈(掠奪)
  • 남해신문
  • 승인 2008.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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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우 영 / 한국 땅이름학회 이사 / 남해군 지명위원회 위원 / 본지 논설위원장

한려수도(閑麗水道)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전남 여수 까지의 300리 바닷길.

정확한 이수(里數)는 알수 없지만 유행가 가사에 ‘300리 한려수도’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한려수도’라는 바닷길이다.

그러나 이 ‘한려(閑麗)’라는 이름이 일제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한려수도’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어지간히 뿌리를 내린 1931년 가즈시게(재임 1931~1936)란 자가 농어촌 자력갱생 이라는 그럴듯한 구호를 내걸고 일제 대륙침략의 별참 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광분하던 때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가즈시게는 조선 통치 24주년이 되던 1934년 8월 29일을 기념해서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승지를 골라 국내·외에 자랑하겠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이 일을 대판 매일신문사로 하여금 추진하게 하였다.

신문사에서는 일본은 물론 조선 13도 주민을 상대로 우편엽서를 이용 조선내의 명승지에 대한 인기투표를 실시했는데 그때 1위부터 8위 까지를 뽑아 ‘조선 8경’이라 하였다.

이때 응모한 엽서가 무려 3400만장이나 되었다니 일제가 이일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 8경’을 뽑고 나서도 많은 표를 얻은 경승지가 남게 되자 9위부터 16위 까지를 다시 뽑아 ‘조선 8승’이라고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때 일제가 ‘한려수도’란 이름으로 투표에 부친 ‘한산도’에서 ‘여수오동도’까지의 뱃길이 2백 22만 표를 얻어 ‘조선 8경’의 8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한려수도’란 ‘한산도’와 ‘여수’의 머리글자를 따라 만든 이름이다. <전 국사편찬 위원회 조사위원 김계유씨 증언>

이처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총독부에 의해서 일제의 의도대로 ‘한려수도’와 ‘조선 8경’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는데 지금도 그대로 써오고 있으니 부르기 쉽고 듣기 좋은 이름으로 새로 지어 부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물며 이 뱃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왜적의 총탄을 맞고 순국 하시면서도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 바다가 아닌가?

또 한산도에서 여수에 이르는 바다곳곳에는 충무공의 숨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이 뱃길이 임진왜란 7년간의 격전지였으며 마지막으로 왜군을 장사 지낸 곳이니 더욱 그러하지 아니한가?

천왕산(天王山)

남면 덕월·구미 마을과 상가 북구마을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산.
정상에 올라보면 여수시와 한려수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다위에 뜬 배가 꿈결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해발 395.2m의 산 정상에 두 개의 큰 바위가 있어 큰 바위를 ‘큰 시리덤’, 남쪽 산정 작은 바위를 ‘작은 시리덤’이라 불렀다.
‘시리덤’이란 이 지방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로 ‘시루 바위’란 뜻 이란다.
그러니까 ‘큰 시루 바위’, ‘작은 시루 바위’란 뜻이다.

이 산 이름이 천황산(天皇山)이다.
국립지리 정보원에서 펴낸 지도에도 물론 ‘천황산’으로 나와 있다.
국가 기관인 이곳에서 나온 모든 지도가 이러하니 다른 공식기록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나 원래 바른 이름은 ‘천왕산(天王山)’이다.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가 조선반도를 강제로 병탄하고 식미지로 삼으면서 치밀하고 음흉한 술수로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고 조선민중 들에게 합방의 당위성을 홍보하기 위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행하여 조선인의 성(姓)과 이름을 빼앗고 만다.

소학교 다니던 시절 필자도 경험을 했던 아픈 추억이다.
개인이나 나라나 힘이 없으면 멸시를 당하거나 강자의 종노릇을 당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가르치는 뼈아픈 교훈이다.

일제는 그것도 부족하여 1941년 4월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우리의 전통적인 땅이름(지명·地名)을 모조리 바꾸는 ‘지방행정구역 폐합’이란 전대미문의 만행을 자해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창씨 개명’에 이어 ‘창지 개명(創地改名)’을 강행한 것이다.
이 일로 해서 우리의 고유지명은 하루아침에 일제식 이름으로 모두 바뀌는 치욕의 역사를 맞게 된 것이다.

1910년 일제가 조선 반도를 늑탈(勒奪)하고 그 4년 뒤인 1914년, 4년 만에 이 일을 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사전흉계가 얼마나 치밀하고 악랄 했는지는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다.

수많은 조선 백성들 개인 이름은 말 할 것도 없고 족보다 지명 까지도 그들 마음대로 난도질을 해버린 것이다.

지금 나라 안에는 ‘천왕(天王)’이라는 지명이 77개소, ‘천황(天皇)’이라는 지명이 55개소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한글학회-한국 땅이름 큰 사전>

그런데 한·일 합방 전 이들의 바른 지명은 모두 ‘천왕’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그들의 우두머리를 흉내 내어 ‘천황(天皇)’으로 강제개명을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으로 그들이 쪽박을 차고 쫓겨 가자 다시 제 이름 ‘천왕’을 되찾은 곳이 많이 있었으나 우리고장 ‘천황산’처럼 그대로 쓰고 있는 곳이 55개소나 된다는 것이다. 하루 속히 본래 제 이름 ‘천왕’으로 고쳐 쓰고 바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땅이름’이 무엇인가?

외솔 최현배 선생은 땅이름을 “우리의 역사·지리·풍속·제도 등 문화생활을 되비쳐 보는 거울이며 우리말과 말꼴의 변천, 그 계통을 일러주는 목소리이다. 또한 우리민족의 성립과 이동, 이웃민족과의 문화교류 등을 전해주는 역사책으로서 우리 조상의 얼과 체취가 담겨있다”고 하였다.

사람 이름 못지않게 지명이 더욱 중요하고 소중하여 함부로 생각할 수 없는 소이(所以)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태어나서 살아가다 죽고 나면 이름마저 묻히고 마는 인간의 한평생과 사람이름, 인명과는 달리 땅이름(지명(地名))은 인류가 살아가는 한 100년 이건 200년이건 아니, 천년 까지도 그대로 잊혀 지지 않고 불려 지게 마련이다.

멀리는 ‘백두산’이 그러하고 ‘금강산’이 그러하고 ‘두만강’이 그러하고 ‘송도’라는 옛 이름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또 가까이는 ‘노량’이 그러하고 ‘망운산’이 그러하고 ‘금산’이 그러하고 ‘평산진’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이 정다운 이름들이 어찌 백년, 이백년으로 끝나겠는가?

지명의 영원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일제가 제멋대로 고쳐 붙인 이름, 또 예를 들어본다.
고현면 갈화 동네 남쪽에 ‘곶안’이란 아담한 남향 마을이 있다.
지금은 본래의 이름조차 잃어버렸지만 당초 ‘곶안’이란 말의 뜻은 ‘바다나 호수 쪽으로 갈게 뻗어나간 육지의 끝 부분 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고현면 갈화 동네의 ‘곶안’마을 형국이 꼭 그러하다.
그러나 이 마을의 본 이름인 ‘곶이안’ 또는 ‘곶안’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이다.
지금 이 마을 이름은 ‘화전(花田)’이다.
마을 이름을 이 처럼 본래 이름과 전혀 다르게 바꾼 원흉(元兇)은 물론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추종자 들이다.

아무 관련이 없는 ‘꽃(花)’이란 글자를 억지로 갖다 붙여 본래 이름과는 전혀 무관한 ‘화전(花田)’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우리 고장에 또 한곳 ‘고잔’마을이다.
지금의 삼동면 ‘영지’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영지’라는 동네 이름으로 불려 지지만 당초의 이름은 ‘곶안’또는 ‘고잔’이었다. 이 마을 지형 역시 마을 뒷등성이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나가고 그 안쪽에 따뜻한 남향 마을이 형성되어있다.

그런데 같은 ‘곶안’마을인데도 고현면의 경우 ‘화전’이라는 전혀 딴 이름으로 바뀌어졌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삼동면 ‘곶안’마을의 경우 지금 부르는 이름은 ‘영지(靈芝)’다.
옛날 이 마을 뒤쪽에 ‘선영(仙靈)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는데 이 ‘선영골’에서 ‘영’자 한자를 따오고, 그 골짜기에 자라는 ‘지초(芝草)’라는 약초 이름에서 ‘지(芝)’자 한자를 따와서 ‘영지’라는 마을 이름으로 불러오고 있다는 이야기다.

일제의 전혀 엉뚱한 우리지명을 말살정책에 굽히지 않고 전통 지명을 지켜온 겨우라고 볼 수 있다.

우리지명 말살 정책이 빚어낸 웃기는 사례를 더 예들어 본다.
남해읍 아산 신기 마을에서 망운산 등산로 입구를 지나 만나게 되는 ‘산부랑’이 마을도 넘어가는 남산 고개 오른편 양지쪽 조그만 뜸을 ‘신촌’이라 부른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야촌(들사부장)과 분동 되면서 ‘새터모’, ‘새터알’, ‘쇠터말’, ‘우모(牛毛)’등으로 불러 왔으나 지금 쓰는 행정도명은 ‘신촌’이다.

이 마을이 처음 생길 때는 인근 주민들이 ‘새터모’, ‘새터말’이라고 불렀을 것은 얼마라도 짐작이 가능하다.

현재 나라 안에 ‘새터모’, ‘새터말’, ‘신기’등의 마을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땅 이름 큰 사전’<한글학회 펴냄>에 나오는 지면만도 2000군데가 넘는다.
그도 그럴 것이 몇 가구가 입주하여 마을이 처음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쉬운 대로 ‘새터모’, ‘새터말’, ‘신기’라고 불렀다.
아마 큰 부락에서는 지금도 ‘새터모’나 ‘신기’라는 이름을 가진 조그만 뜸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 ‘신촌’마을 이름의 변천사를 훑어보자.
처음에는 ‘신촌’으로 불렀다.
193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러다가1941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신촌’이란 뜻의 ‘새터말’을 ‘쇠터말’로 착각하고 이 지명을 억지로 한자말로 바꾸면서 그대로 ‘우모(牛毛·쇠털)’라고 써버린 것이다.

일제의 맹목적 미친 식민지 지명정책이 이 지경이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신촌’이 ‘새터말’, ‘새터모’가 되고 드디어 ‘우모(牛毛·쇠터말)’가 되다니 참으로 소가 웃을 일이 아닌가?

남면 ‘구미(九尾)’로 본다.

지형이 ‘거북꼬리’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처음에는 ‘거북구(龜)’자 ‘龜尾’로 써 왔는데 일제에 의해서 아홉 구자 ‘구미(九尾)’로 바뀌고 말았다.

일제가 내 세운 구실은 ‘거북구’자가 너무 획수가 많고 어려워 주민들이 쓰기에 불편 하다는 구실을 앞세웠지만 진실은 상서로운 동물인 ‘거북구’자를 쓰면 마을에서 뛰어난 인재가 태어나게 되므로 이들 막기 위하여 ‘아홉구’자를 쓰게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용렬한 생각인가?
비슷한 예가 창선면 ‘오용(五龍)’마을에 도 있었다.
이 마을의 지형이나 하천의 형상이 용 다섯 마리가 꿈틀대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일제는 이 이름을 그대로 두면이 이곳에서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믿고 이를 막기 위하여 ‘용용(龍)자’를 ‘쓸용(用)’자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용’이란 상서로운 동물일 뿐만 아니라 용상(龍床)이니 용안(龍顔 - 왕의 얼굴 의 높인 말)이니 하여 우리국민들 사이에 서는 왕에 관한 여러 용어의 접두사로 많이 쓰이는 글자란 것이 저들의 비위에 거슬린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五用’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어린애 같은 지명정책이 아닌가?
이웃으로부터 제대로의 대접을 받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경구는 개인이나 국가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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