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 민족의 숨결과 문명의 뒤안길에서 그 맥락을 찾아 수 천년 동안 조상들의 생활로 면면이 이어온 한민족의 손때가 묻어 있는 절구. 그 숱한 사연과 함께 조상의 얼을 간직해온 흘러온 역사.

한 많은 절구에 대한 온갖 슬픔과 기쁨을 같이해온 ‘절구’를 재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절구는 우리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온 여인네들의 한숨을 찧던 결코 없어서는 안 될 방아용 도구(노동도구)이기도 했다.

곡식을 찧거나 빻는 기구로써 가장 오래전부터 쓰여 오던 생활용품중의 하나가 바로 절구였다.

쌀·보리쌀을 찧는것은 물론 떡쌀을 빻는 일, 메주콩을 삶아서 찧는 일 등을 모두 절구로만 이용 했던 것이다.

가정에서 쓰는 절구로는 나무절구와 돌절구가 있고 근년에는 무쇠절구가 일부 보급되기도 했으며 또 절구의 일종으로 ‘확돌’ 이라는 것이 있어왔다.

대개 어른의 한 아름이나 되는 나지막한 돌을 넓적하게 파서 손안에 들 수 있는 크기의 갈돌을 갖고 ‘확돌’안에 넣어 고추나 죽 쌀을 가는 것을 말한다.

시골에서 인절미 같은 떡을 만들 때 잘 찐 찹쌀을 이 ‘확돌’에 넣고 절구대로 쳐서 이겨낸다.

절구를 지방에 따라서 절구통 또는 절기 방아라고도 불러 왔다.

어느 가정에서나 부엌 앞이나 장독대 옆 또는 곳간 앞에 절구통이나 ‘확돌’이 놓여 있었다.

만들기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절구의 모양은 통나무를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고 혹은 장구모양으로 중간의 배 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간 곡선을 이루는 것도 있다.

절구의 크기는 대체로 여자 키의 절반쯤 된다.

따라서 통나무를 그대로 만든 절구는 통통하고 짤막하게 보여서 맵시 없는 여자를 말할 때 흔히 절구통 같은 여자라고도 부른다.

절구대는 장구를 길게 늘어뜨린 형태로 양쪽을 번갈아서 쓰도록 돼 있다.

1개의 절구에 보통 두 사람이 맞공이질을 하기도 했다, 절구대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팔 힘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 발로 밟는 힘으로 찧도록 한 것이 디딜방아였다.

또한 발로 밟는 대신 물의 힘을 이용한 것이 물레방아의 원리였다.

그러나 요즘의 도시에서는 ‘확돌’대신 분마기가 나와 더욱 편리하게 이용되고 있기는 하다.

도시의 가정에서는 대부분 무쇠로 만든 양념절구가 나와 있다.

오늘날은 명절준비로 떡을 빚을 때도 필요한 양의 쌀을 갖고 떡 방앗간으로 가거나 아예 떡집에 가서 주문하는 것이 습관화 돼 있다.

떡쌀을 물에 담갔다가 건져낸 뒤 절구에다 빻아서 체로 쳐내어 가루로 만드는 정성에서부터 음식은 생명력을 띠게 된다는 얘기다.

이렇게 쿵쿵하게 찧는 소리에 푸근한 살림 생각에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이름만 남아 있는 정도다. 그러기에 한때 가난을 찧고 한숨을 찧는 것이기도 했었다.

하루해가 저물도록 또 찧고 또 찧어봐야 하루 양식도 모자라니 시름속의 나날이었다.

그래서 방아에는 유난히도 타령이 많은데 대부분이 신세타령이며 가난에 부대끼는 삶을 하소연하는 것들이다.

/어느 천년에 다 찧어서 태산구경 언제 가며 /방아 방아 찧는 방아 / 쿵덕 쿵덕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밤 마실 깔까나/ 몇 개의 민요만 보더라도 방아 찧기가 얼마나 힘든 노동이었는가 알만도 하다.

모처럼 거둔 곡식도 바심하고 털고 대꺼야 했던 그 시절 그래서 방아는 그 당시 중요한 도정 기구였고 그만큼 여인들에게 한 많은 고생을 강요했을지도 몰랐다.

방아 중에서도 가장 흔한게 절구였다. 그것은 무엇이던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도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에 찌들었던 우리 민족. 그렇게 오랜 세월을 굶주리며 살아온 거름뱅이 배 이기에 먹을 것을 보면 환장증이 생겨 절구질 소리에 벌써 입에 침이 괴었을지도, 디딜방아 앞을 청소만 해도 헛기침이 나왔으리라.

그만큼 절구방아는 음식을 만들기 직전의 과정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식구가 많은 만큼 절구질을 계속해야 하는 고달픔도 많았다.

절구질 보다 좀 나은게 디딜방아였다.

절구방아에는 찧지 않는 것이 없었다.

보릿고개를 넘기려는 /풋보리는 원수방아였고 /기장을 찧으면 미끌방아 /벼를 찧으면 웃음 방아 /고추를 찧으면 맵다고 해서 시어머니방아/ 메주콩을 찧으면 시누이 방아/라고 했다.

가정에 대사라도 있으면 몇일째 힘겨운 일이기도 하지만 방아공이에 불이 났다.

이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어머니들은 방아 찧기에 이골이 났다.

가난한 살림에 풋보리를 찧을 때는 시집 잘못 온 것이라고 후회도 했을 것이며 여름 내내 보리방아 밀방아는 고달픔으로 인한 신세타령으로 절구에 한숨이 가득 담겼을 것이다.

한손으로 절구질울 하며 또 한손으론 곡식을 뒤집으며 어머니들은 보이지 않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삼국시대때 부터 있어 왔다는 한숨을 찧던 방아.

입과 코를 수건으로 막고 고추를 찧던 절구도 /달팽이가 침으로 줄을 긋던 디딜방아도/ 한세대를 건너뛰고야 말았다.

절구면 다 같은 절구인가. 가난에 한숨을 찧던 옛날의 어머니들의 절구질과 배부른 오늘날 어머니들의 절구질은 찧음새가 같을 리가 없다.

절구역시도 우리의 애환이 가장 많이 스며있는 생활용구임에 틀림없다.

가난과 함께해온 절구. 이젠 먼 추억 속으로만 사라져가고 보려고 하면 박물관의 유물로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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