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류화가 김희재
그는 창선 중·고등학교 설립자인 송암 임충규 선생의 셋째손 임정택(송암 산업회장) 씨의 부인이다.

송암 선생은 휘문고보를 졸업 일본 와세다 대학 서양학부 전공 조선어학당 사건에 연류 금강산 유점사에서 3년 7개월 은거, 해방과 동시에 휘문고보 동창인 여운영선생과 해방조국의 근대화에 일조하다 여운영 선생 암살로 고향 창선에 내려가서 전국 최초의 면단위 중학교를 설립한 선각자인 할아버지를 김희재 화백이 존경하는 분으로 항시 자랑스런 자부심에 살며 그림에 몰두한다고 한다.

방송 극작가 김정수씨는 “예술가를 둘로 나눈다면 스스로의 열정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쪽과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런 품성과 재주를 타고나는 쪽으로 나눌 수 있다.

그녀는 틀림없이 타고난 예술가라 생각한다.

노력하는 화가! 김희재 그림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향기가 있다"고 했다.

수필가 피천득씨가 그림을 감상하고 “당신이 한국에 최고 화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중앙대학교 회화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Ecole des Beaux-Arts를 수학하였다. 그간 9회의 개인전(조선화랑, 선화랑, NEW YORK ART EXPO 미국 Gallery des I' International interculture-프랑스 등)을 가진 중견 화가다.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김희재 작업실을 찾으니 잔잔한 선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할 것이라는 나의 생각을 말끔히 지울 수 있었다. 여기에 부단히 노력을 많이하는 화가라는 것을 그의 경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세 남매를 둔 가정주부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삶을 영위하면서 작업실에서 혼신의 힘으로 빚어내는 그림이기에 더 값지고 아름답다는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의 열정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화폭에 담고 있었다.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미적인 세계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그녀가 정말 아름다웠다.

이렇게 명성 높은 화가가 되기까지에는 한국의 수채화가의 대가이신 배동선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김희재 화가의 그림을 보고 “가슴을 치는 그림이다. 지금부터 김선생을 대가로 모시겠소" 라고 하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그녀는 ‘꽃의 화갗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이 글을 인용해본다.

<지난 30년동안 '시들어가는 꽃'이란 독특한 소재로 그림을 그려온 김희재씨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워크숍 초대전을 연다. 뉴욕에서 열린 뉴욕 아트 엑스포에 출품했던 김씨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화랑은 세계각국 가는성 있는 화가들을 발굴 후 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라는 호평의 기사를 실었다.

하나의 예술품이 탄생되기까지에는 피나는 노력과 각고의 수련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스치는 바람소리까지 들려 올듯한 섬세함과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한 줄기의 시가 있었고 음악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고, 상큼한 향기도 있었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 그림속에서 걸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정도로 현실감이 있었다.

조용한 갈색의 풍경, 누군가를 위해 켜놓은 등불이 있는 그림은 내 꿈속에서 보던 풍경이었다. 가느다란 첼로의 선율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그림은 난해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들게 하지 않으면서도 격조가 있었다.

11월 초에 화가생활 40주년 기념전시회겸 ‘김희재 갤러리 개관전’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더욱 생명력 있고 왕성한 작품으로 향리 남해를 빛내주기를 기대해 마지않으며 김화백의 건승을 기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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