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설천면 왕지리에서 남평 윤주석 선생의 독립지사 비 제막식이 있었다.
이날 제막식은 고려대학교 교우회, 고려대 부산 교우회 회원 20여 명과 남평 선생의 유족 20여명, 남해교우회 김영조 도의원과 김일주 부군수, 김영태, 윤백선 군의원, 이길한 문화관광과장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부산 교우회에서 60년 역사를 기록·집필하던 중에 역사에 묻힐 뻔 했던 독립투사 남평 윤주석 선생의 발자취를 발견해, 고려대 전국 교우회에서 남평 선생을 애국지사로 추모, 관계 당국과 모든 절차를 거쳐 이번 제막식을 가지게 됐다.
김태원 부산교우회장은 “처음에는 간단하게 부산교우회의 이름으로 제막식을 치루고자 했지만 남평 선생의 업적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전국적인 고려대 교우회의 이름으로 이뤄지게 됐다”며 “오늘을 기해 남평 선생의 공적이 세상에 알려져 나라를 위하는 그분의 정신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배웠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김일주 부군수는 “대단한 업적을 남기신 남평 윤주석 선생을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됨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남평 선생의 독립투사 칭호를 봉정하고 오늘 고향땅 왕지공원에 뜻있는 공적비를 세운 일은 역사적인 일이다”라고 말했다.

남평 윤주석

남평 선생은 1889년 경남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서 윤창호 옹의 3남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한문 서당에서 10년간 수학하면서 수리와 시문에 뛰어나 남다른 영민함을 보여주었으며 1908년에 관립 한성 사범학교 본과(3년제)에 입학해 본과 2년을 수료했다.
1905년 당시 을사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외교권을 박탈함에 이어 1907년 정미7조약에 따른 구한국군 해산과 일인 차관정치를 도입하고 각 부처에 일본인을 기용하는가 하면 경찰권에 이어서 징세권까지 탈취하는 등 침략이 노골화 돼 가는 중 각처에 의병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 1908년 한때 이인영의 의병연합군은 일만에 이르고 허위의 선발대는 동대문 밖 30리 까지 진입해 일본군과 교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재판권까지 박탈당한 상황 속에서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해 민족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만방에 알린다.
안 의사는 1910.3.26자로 일제에 의해 순국당한 소식은 보도를 통해 국내에 알려지게 된다. 이시기에 남평 선생은 사범학교를 자퇴하고, 1911년 대한제국의 한성사범학교가 ‘조선교육령’에 따라 ‘경성보통학교’ 사범과로 개편해 식민지 통치 교육이 강화 되자 일제의 탄압에 저항해 ‘눌린 자를 쳐들고 굽은 것 펴기’란 뜻을 펼치기 위해 사립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진학 후 소강 윤도청 선생의 격려와 지도 속에 면학해 3년을 줄 곳 우등상을 수상한다.
1914년에는 ‘토지 제도수’ 수업을 받았지만 조선 총독부에 의한 토지 박탈 사업임을 간파하고 관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이전의 1913~4년경 수학했던 조선어연구회 ‘한글모’에서의 민족정신을 더욱 다져 나갔다.
이시기에 일제의 식민지 수탈 경영이 본격화 되면서 무역고는 두배의 수입초과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에 위기를 의식한 선각자 중 한사람이었던 백산 안희제 선생은 부산에 1914년 백산상회를 설립했는데 주로 영남 일원의 지주들을 모아 3.1운동 전후 자본금 일백만원 규모의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해 일제 자본의 침탈을 방어 해 나가며 민족자본의 교두보로 삼고자 했다.
한편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남평 선생은 1916년에 백산상회에 무보수 서기로 자원입사하게 된다.
이후 백산이 전개한 국내외 21개소의 지점 및 연락사무소에 실무책임자로 참여해 기업운용과 독립운동의 연락망을 구축하는데 있어 백산을 도와 빈틈없는 장부비치와 대조 서증 확보 등으로 ‘장부상 거래의 형식을 취한’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 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었다.
또한 백산의 3.1운동의 배후 지령지로서 그리고 임시정부와의 연통제 사무국 실무책임 역할을 수행 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기미육영회가 독일에 안호상, 이극로, 영국 상선학교에 신성모 등 인재를 해외 유학생으로 파견할 때에도 일경의 감시를 따돌리고 실제 선편을 마련하고 전송했다.
1920년 백산무역주식회사에 대한 일경의 여러 차례 수색과 장부 압수를 통한 추궁과 문초로 백산은 남평 선생과 협의하고 경남은행 하동지점 서기로 입행하게 했다.
이후 남평 선생은 당시 중국으로 수출하던 화물대금의 어음할인과 국내지주들이 기탁해 오는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고, 의령 산청방면의 한지수집과 중국 안동 천진으로 보내는 열차편 탁송의 일과 자금융통의 요원으로서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보급 등의 활약을 해 나갔다.
부산의 동광동에 설치 됐던 부산백산무역주식회사는 당시 영남일원의 지주들로 구성된 당당한 회사였지만 독립운동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노골적인 일제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4차례의 증자에도 불구하고 차차 사세가 기울어 1927년 해산되고 말았다. 백산은 1927년 7월 경남은행 감사에 취임해 남평의 업무를 종결 시키고 8월에 경남은행을 퇴사하게 한다.
1928년이 되자 일본의 금융자본이 일제의 비호 하에 물밀듯이 들어온다. 조선총독부의 금융 관계 정비 작업은 영세 은행을 면치 못한 경남은행에도 밀어닥쳐 문을 닫게 된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 열강들은 세계 경제공황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는데 일본도 불경기를 군사적으로 풀기위한 1930년의 상해사건에 이은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해 사실상 만주를 점령하고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군국주의 방법에 의한 블록(bloc)경제 구축의 시도로 불황을 해결 하려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미국과 대립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불러와서 패망의 길을 자초했던 것이다.
경남은행을 퇴사한 남평 선생은 하동 지역에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한 백산선생을 위시한 소파 방정환, 남강 이승훈 등 지도자들을 모아 향교활동을 펼치며 독립정신 고취 운동을 계속해 나갔는데 얼마 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백산 선생의 고문으로 인한 순국의 비보와 광복을 함께 맞았다.
남평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서 ‘교육’으로 뜻을 품어 1947년 하동중학교 창설 기성회 상무이사로, 하동향교 장의로서 활동했으며 1948년에는 대한독립 촉성 국민회 하동군 지부 부회장으로 정부수립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9년에는 향토의 부름에 호응해 남해에 귀향하고 설천, 삼동 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어린 새싹들을 길러내는데 매진하던 중 6.25가 발발한다.
1953년이 되자 학교에 주둔했던 국민방위군이 철수하면서 학교 기물을 무작정 징발해 차량에 적재 하자 남평 선생이 나서서 학교살림의 어려운 사정을 말해 서슬퍼런 군인들을 설득시키고 환수 조치시키기도 했다.
그해 유월이 되자 하동고교 건설과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지역민과 유지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하동고 교장으로 취임하고 당장 부족한 교실난을 해소코자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통영 어업조합의 헌 목조건물을 양여 받아 해체하고 뱃편으로 하동으로 이송했다.
당시 학교신축에 골몰하던 남평 선생은, 노임을 독촉하는 인부들의 태업에 건축 현장에서의 혼신의 노력으로 노동자들을 감동시켜 교실을 완공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1954년 3월 6일에 일면 학교교사 신축, 일면 인재양성에 몰입 하던 남평 선생은 발병으로 향년 65세에 숨을 거두게 된다.
당시 하동유지와 향민들은 학교장으로 장례를 지내며 남평 선생과의 영결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조국의 광복운동과 교육자로서 남달리 준엄, 성실 했던 남평 윤주석 선생은 백산, 창남과 더불어 백산상회 독립운동 3호의 한 동지로서 한 평생을 다하니, 경남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 구두산 참샘골의, 노량바다와 남해 강진 바다가 바라 보이는 언덕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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