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 태종은 세종 즉위년인 1418년 8월 25일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과 좌랑 채지지(蔡知止)를 잡아 의금부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군사에 관한 일을 상왕인 태종에게 먼저 아뢰지 않고 임금인 세종에게 보고한다는 이유였다.

태종은 셋째아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군사정책에 문외한이었던 임금을 믿지 못하여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친히 청단(聽斷)하겠다”고 말했다. 강상인은 임금에게만 아뢰고 태종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상인은 태종의 가신으로, 30여 년 동안 그를 보좌해 왔다. 하지만 태종은 냉혹했다. 임금인 세종의 장인이자 자신의 사돈인 심온 일가의 병권장악 의도를 경계하고 있던 터라 이 기회에 외척과 주변을 정리하리라고 마음먹은 듯했다.

‘강상인의 옥사’는 드디어 시작되었다. 최종 목표는 영의정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간 심온이었다. 옥사의 근원은 군사문제에 대한 보고 잘못을 떠나 더 깊은 곳에 있었다. 단지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죽을 죄는 아닌 것이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 심씨의 숙부인 심정이 강상인과의 대화 속에서 던진 말이 빌미가 되었다. 심정은 “영의정은 높지만 실권이 없고, 좌의정은 이조, 예조, 병조, 우의정은 호조, 형조, 공조를 겸할 수 있으니 병조판서를 겸할 수 있는 좌의정이 좋다”고 했다. 좌의정 박은과 병조좌랑 안헌호는 이 말을 가공하여 상왕 태종에게 심씨 일가가 병권을 장악하려 한다고 밀고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 사건으로 남해로 유배된 박의습의 아버지 박습은 병조판서로 강상인의 상관이었기에 함께 처형되었다. 태종은 심온에게서 “국가의 명령은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자백을 압슬형이라는 고문을 통해 억지로 받아내게 하여 주변세력을 정리해 나갔다.

강상인, 심정, 박습 등은 결국 처형되었다. 명나라에서 돌아오던 심온은 딸 소헌왕후의 귀국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의 재상으로서 비겁하게 숨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돌아와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태종은 박은과 안헌오의 밀고가 일정부분 가공된 줄 알면서도 왕권강화를 위한 외척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극약처방을 내린 냉혹한 군주였다. 심온은 죽으면서 “박씨와 심씨는 원수지간이니 앞으로 절대 혼인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장인을 죽이고 왕비가의 몰락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무능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상왕인 태종과의 대립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 했던 패륜적 이율배반은 아니었을까?

아버지 ‘박 습’과 아들 ‘박의손’

강상인의 옥사 당시 병조판서였던 박습(朴習)은 고려 공민왕 16년(1367) 함양군 안의에서 태어나 고려 우왕 9년(1383)에 등과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 그해 의령현감에 부임한 후 정종 때 좌간의, 태종 때 우간의, 강원도관찰사, 인녕부윤 등을 거쳐 1411년(태종12)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전라도관찰사를 부임한 후 백성들이 물이 부족해 농사를 짓는 데 애를 먹는 모습을 보고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를 300년 만에 다시 수축하여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 후 박습은 의금부 제조, 호조참판, 경상도관찰사,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18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심온을 제거하려는 태종에 의해 9월 6일 사천에 유배된 후 11월 26일 참수 당하였다.

문종 원년 좌의정 황보인, 우의정 남지, 좌찬성 김종서 등이 주청하여 아들 박의손과 함께 신원되고 직첩도 환급 받았다. 아들로는 의건, 의곤, 의보, 의경, 의손 다섯을 두었다.

박의손은 함양 박씨 부사공(副使公) 지수(之秀)의 7대손으로 당시 사헌부 감찰이라는 벼슬자리에 있었다. 태종 11년(1411)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2등으로 입격하여 주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418년에 아버지가 병조판서로서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병무(兵務)를 처리했다는 죄로 참수형을 당할 때에 남해로 귀양가다가 좌천역에서 도망하였지만 유배지로 다시 돌아왔다가 세종 4년(1422) 적신의 아들로써 반성하지 않는다 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박의손의 유배와 도망 그리고 처형의 과정이 분명이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 여러 가지 자료에는 강상인의 옥사 때에 아버지 박습과 처형되었다고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참형에 처해질 때 곤남현 관노의 신분으로 기록되어 있어 남해에 오지 않고 곤남으로 바로 갔다거나 이배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남해군의 역사를 되집어 보면 분명히 남해로 유배왔음이 밝혀진다. 강상인의 옥사가 일어나기 1년전 해양현이었던 남해는 금양부곡의 진주 합병으로 남해현으로 복현되었다가 옥사 후인 1419년 곤명과의 합병으로 곤남군으로 개칭되어 1437년 남해현으로 될 때까지 18년간 곤남군이었기 때문에 박의손이 처형될 때는 곤남군이었던 것이다. 박의손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세종 즉위년(1418) 11월 26일 : <전략>박습의 아들 박의손을 남해로, 박의보를 광양으로,<중략> 귀양보냈다. 박습은 옥중에 있다가 벌써 죽었다.<하략>

세종 즉위년(1418) 12월 13일 :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박습의 아들 박의손이 좌찬역(佐贊驛)에 이르러 도망해 숨었사오니, 공문을 보내어 잡기를 청합니다”<하략>

세종 4년(1422) 4월 19일 : 박의손을 죽였다. 의손은 역적 박습의 아들로서 곤남현 관노(官奴)로 몰입되었는데, 그 어미는 습의 버림을 받은 아내이므로 서울에 살게 되었다.

의손이 천역을 싫어하여, 글을 지어 관찰사 최사강(崔士康)에게 바쳤는데, 말하기를, “한 남자의 탄식으로 6월에 서리가 내리고, 한 여자의 원망으로 3년 동안 큰 가물이 오는 것이다. 만일 모자를 같이 살게 하면 천행입니다” 라고 하였다.

사강이 그 사연을 보고하니, 태상이 말하기를, “의손은 본시 죽을 사람이나 내가 특히 용서하였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도리어 원망과 분을 품었단 말이냐” 하고, 의금부 옥에 내려 치죄하여 참형에 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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