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내에는 문화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제대로 잘 아는 이는 없고, 밖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주민들 중 모르는 이는 거의 없는 유·무형의 소중한 문화재와 전설 등이 많다. 이에 남해를 진정한 보물섬으로 만드는 소중한 우리의 재산을 찾아 함께 알아가고자 한다. 나아가 더욱 잘 가꾸고 지키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보자. <편집자 주>


밑줄 쫙!


남해다정리지석묘는...


남해다정리지석묘는 이동면 다정리 현 농업기술센터 뒤편 논밭 사이에 자리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고인돌이다.

지난 1983년, 청동기시대를 연구하는 학술연구자료로 인정받아 경상남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돼 현재 남해군이 관리하고 있다.

다정리지석묘는 개인 소유 부지 논둑에 3∼4m 간격으로 11기가 분포돼 있으며 바둑판식 지석묘로 구분되고 있다.

바둑판식 지석묘는 남방식 고인돌을 일컫는 말로 남방식 고인돌은 다시 북방식, 개석식 고인돌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의 형태 중 하나다.

남방식 고인돌은 남부지방에 분포하는 것으로 다정리지석묘와 같이 매장시설의 주요 부분이 지하에 설치돼 있어 북방식 고인돌과 구분되며, 지상에서 보기에는 큰 바위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형상이다.

또 지상에서 보이는 큰 덮개돌에 받침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눠 받침돌이 있는 것을 남방식 즉 바둑판식이라 하고 받침돌이 없는 것을 개석식이라 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고인돌은 개석식이며 나머지 대형 고인돌은 기반식인 것으로 조사됐다.

다정리지석묘의 덮개돌은 큰 것이 길이 3m, 너비 2m 정도의 규모로 9기 정도가 특정한 규칙 없이 흩어져 있으며, 간혹 분묘도 보인다.

덮개돌 아랫부분에는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돌상자 모양의 돌널과 돌을 쌓아 만든 석곽 등이 있고 시체와 함께 묻는 부장품으로 돌칼과 돌화살촉, 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되면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중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


남해다정리지석묘는 지금

정밀조사로 의미 규명 ‘필요’


다정리지석묘는 비교적 양호한 보존 상태를 보이며 아직은 미발굴된 상태로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우리 지역의 생활상과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나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보다 높이기 위해 정밀 조사·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남해군 담당자에 따르면 도로 공사나 건물 개·보수 공사 등이 있을 때 문화재 보존의 필요에 따라 발굴하고 자연스럽게 발굴한 학술 단체에 의해 연구된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담당자는 “지자체의 관심 정도에 따라 의미를 달리 하는 것이 문화재”라며 “가령 이 고인돌이 발굴돼 학계의 연구를 거칠 경우, 단순한 고인돌 군락지라는 것에서 청동기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역사적 의미가 보다 확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남해군내에는 다정리지석묘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고인돌이 1기 혹은 군락을 이루며 현재까지 70여 기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이 보다 정밀한 연구 조사로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청동기 유적지로서 남해군을 새로운 역사·문화지로 격상시킬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군내 고인돌에 대한 연구·조사는 지난 1967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대학교 부설 동아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가 있었고 이후 1987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학술연구보고를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현재 군내 고인돌 현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읍 심천마을 고인돌 떼는 한국전력 남해지점 남쪽 담 아래 빈터에 자리한 3기의 고인돌로, 인근 주택을 수리하다 고인돌 부근에서 돌칼 등의 유물이 출토됐으나 지금은 유실돼 행방을 알 수 없다.

▲남해읍 평현마을 고인돌 떼는 양지마을과 야촌마을 사이의 논밭 고랑 사이로 모두 12기 정도가 흩어져 있다. 이곳 역시 돌칼이 발견됐으나 유실된 상태다.

▲남해읍 봉성마을 고인돌 떼는 모두 5기로 일부는 파손된 상태다.

▲창선면 다항마을 고인돌 떼는 논·밭, 심지어 개인 가옥 내에 산재해 있다.

▲서면 대정마을 고인돌 떼는 기반식으로 6기 정도가 마을 입구 등지에 흩어져 있다.

▲서면 서호마을 고인돌은 1기로 서면 대정마을 고인돌떼와 가까워 같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남면 오리 고인돌 떼는 개인 주택 인근 밭에 7기가 모여있다. 밭 경작으로 매몰되거나 파손된 상태다.

군내 곳곳에 지석묘가 분포돼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일정한 문화를 형성하며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조 기자 남해다정리지석묘 만나러 갑니다


재밌는 역사 공부의 장


남방식 고인돌은 늘 재미가 없었다.

북방식은 그나마 벽도 있고 지붕도 보여 일정한 형상이 그려지는데 남방식은 바위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영 평범하기 때문이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북방식은 제사의식용으로 쓰이던 무덤으로  바위들이 비교적 얇은데 반해 남방식은 우두머리들의 묘로 말 그대로 ‘무덤’의 기능을 했으며 우두머리의 권력의 크기에 따라 덮개돌도 크고 두껍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보면 남방식 고인돌도 꽤 재미있다.

다정리의 고인돌 덮개돌들은 무척 굵직굵직했던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 유지들이 많이 거주했던지 아니면 권력층의 공동묘지쯤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으레 권력이란 세습되는지라 어쩌다보니 일개 가족묘가 됐을지도 모른다.

재밌다.

기본적으로 신체를 매장했을 것이고, 당시의 생활품들도 함께 있을텐데 바위를 들어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불끈거린다.

국사 책에서 남방식 고인돌의 흑백 사진을 보며 남방식, 북방식을 달달 외던 학창시절이 떠오르자 슬금 약이 오른다.

진작에 이 가까운 곳에 고인돌이 있는 줄을 알았으면 국사 공부가 몇 배는 즐거웠을 것이었다.

왜 대한민국은 이 좋은 학습체험거리를 곳곳에 흩어두고는 ‘재미없이 공부하는 법’을 권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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