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량상동정마애비는 지금


무분별한 쓰레기와 관리 부재로 몸살 중


장량상동정마애비와 주변은 쓰레기 투기와 적절한 관리 부재로 보호 문화재로서의 면모를 거의 잃은 상태다.


도 지정 문화재 면모에 걸 맞는 보호책 등의 설치는 고사하고 마애비 주변은 허물어진 언덕에 뽑히고 부러진 나무들와 굴러 내린 듯한 바위가 즐비하다.


또 주변에 무분별하게 버려진 폐 그물 등 생활 쓰레기도 어지러운 환경에 한 몫 하고 있다.


이에 더해 인근 건물 개축에 따른 건축자재들까지 널린 마애비 주변은 도 지정 보호 문화재라고 말하기 민망할 지경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


언덕에 붙어있던 마애비와 언덕이 지난 태풍 매미호로 10m 이상 떠내려 온 것.


문화재 보존이 시급해 남해군은 2억 원의 예산을 경남도에 신청했으나 경남도는 보수 예산으로 6000만원을 지원했다.


이를 통해 더 이상 비가 떠내려가지 못 하도록 진입도로 겸 방파제를 축조하는 등 주변 정비를 한 상태지만, 매미 태풍 피해의 정도가 심해 인근 주변 부지 매입 관계 등으로 문화재 보존에 대한 원활한 예산 집행이 되지 않고 있다.


주변 정비도 문제지만 마애비 자체에 대한 보수도 시급하다.


암각 비문이 마모된 정도가 심해 탁본을 하는 등의 기본적인 보존 행위와 마애비로의 접근을 제한하는 철책 등 구조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밑줄 쫙!


장량상동정마애비는…


장량상동정마애비는 남해읍 선소마을 바닷가 어귀에 있는 높이 5m, 폭 1.5m의 자연석에 암각한 비다.


자연석을 깎은 비라는 뜻으로 ‘마애비(磨崖碑)’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애비 조성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패해 달아나던 일본 패잔병들을 쫓던 명나라 군이 전투 직후 자연암에 새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문에는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제독 이여송과 수군도독 진린이 남해에 와 왜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있으며 독공정왜유격장군(督工征倭遊擊將軍) 장량상이 세긴 것으로 돼 있다.


자연 화강암을 깎아 글을 세기고 테두리에 당초문(중국 전래의 덩굴풀 모양의 문양)을 그려 비문을 완성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마애비로 평가받아  지난 1972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됐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파괴대상으로 작성한 왜구격파 기념비 목록에도 들어있었다고 전해진다.




군내 문화재 비석 소개


▲ 남해척화비
조선조 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따라 전국 곳곳에 세워졌던 척화비 중 하나로 추정되는 비다. 여느 척화비들처럼 주문 등 글자는 같으나 크기와 규모등 형태가 달라 지방관청이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화재 자료 266호.

 

 

 

 

 

▲ 남해금산영응기적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백일기도를 올리던 자리에 광무7년(1903) 종일품 숭정대부 였던 윤정구가 임금의 명으로 세운 비다. 이 후 일제의 침략으로 비각이 허물어 진 것을 전주이씨종친회가 추념각을 건립하고 기적비와 축성비를 옮겨 세웠다. 문화재자료 277호.

 

 

 

 

▲ 자암 김 선생 적거유허추모비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남해로 유배된 자암 김 구 선생은 조선에서 내노라하는 서예가였다고 전해지며, 남해에서 화전별곡과 경기체가 등의 작품을 짓기도 했다. 이 비는 선생의 6대 후손인 김만화 선생이 남해 현령으로 부임해 와 세웠다. 군 보호 문화재 2호.

 

 

 

 

 

▲ 봉천사묘정비
조선 숙종 18년(1692) 기사환국으로 귀향살이를 하던 이의명 선생이 남해에 와 지역 유림들에게 ‘충신효제’의 학문을 가르친 뜻을 기리며 세워진 비석이다. 학문을 가르쳤던 사당도 있었다 하나 현재는 비만 전해진다. 군 보호 문화재 3호.

 

 

 

 


 

조기자 장량상동정마애비 만나러 갑니다


끝나지 않은 난(亂)


한 바탕 난리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음지에 장량상동정마애비가 있었다.

바람과 파도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며 마애비를 감싸고돈다.

임진왜란을 그리는 드라마에서 명나라는 늘 미련한 수퇘지 같았다.

미련하고 욕심만 많은 그들이었으나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한 시절을 함께 한 명나라는 분명 조선의 아군이었다.

물질 문명이 갈수록 비대해져 이제 썩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 시점에서라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을 되새기게 하는 이 암각비의 처절한 모양새는, 오히려 당연하다.

마모가 심해 도저히 식별이 불가능한 비문이 말한다.
역사는 국사 교과서에만 있고 이순신 장군은 드라마에만 있다고.

인근에 사는 주민도 그저 ‘큰 바위’로만 알고 있는 장량상동정마애비는 지금, 인근 가정에서 키우는 듯한 누렁이(종이 묘연한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다.

마애비 바로 옆에 보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개는 오래 전에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난리를 목도하고 있었으나, 방문객을 맞는 자태만은 난리를 통해 인생무상을 경험한 선인(仙人), 아니 선견(仙犬)인 듯 유유자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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