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해역사연구회 문학분과위원장
- 남해문학회 회원
- 남해농협 근무
성리학은 다른 사상에 대해 극히 배타적 성격을 보였다. 배타성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후대에 나타난 결과는 그러하다. 특히 가장 신랄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 불교의 선종이었는데, 그 이유가 아이러니하다.

성리학이 나타나기 전의 중국에서 가장 유행한 사상이 바로 선종이었고, 성리학은 선종을 흡수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흔적의 하나가 바로 성리학에서 수양의 한 방법으로 삼는 居敬(거경)이었다.

거경은 곧 선종의 참선과 같은 것으로, 이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있었지만, 이러한 비판이 성리학 형성의 근원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만필에서는 이러한 성리학의 출생 비밀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는 성리학자 중에는 선불교와 깊이 관계된 인물들이 많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王介甫-왕개보(安石-안석의 字)는 新經(신경)으로 선비를 뽑아서 천하의 學究(학구)를 변화시켜 秀才(수재)로 만들려다가 도리어 모든 수재를 학구로 변화시켰고, 程伊川(정이천)은 道學(도학)을 밝혀 천하의 禪學(선학)을 몰아다가 儒者(유자)로 만들려다가 도리어 모든 유자를 몰아다가 선학으로 만들었다. 이 두 가지 일은 자못 비슷하다. 개보는 이미 스스로 후회할 줄 알았지만, 이천이 무엇이라고 한 지는 모르겠다. 

이것은 주자학의 근원에 있는 정이에 대한 완곡한 비판이면서 성리학의 본질에 대한 서포의 견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는 성리학의 형성기에 다수의 학자들이 불교 특히 禪(선)에 깊이 몰두하였음을 朱子語類(주자어류)의 기록들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서포는 남해 유배시에 먼저 향교에 들러 朱子語類(주자어류)를 빌렸다. 그 책의 卷第(권제)126은 釋氏(석씨)편인데, 이것은 주자의 불교관을 모두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포는 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고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荷澤神會(하택신회)는 曹溪(조계) 문하의 知解宗(지해종)이다
 그는 “知 한 글자가 衆妙(중묘)의 門이다.” 라고 하였다. 주자는 일찍이 하택이 (중략) “본연의 定慧(정혜)로써 마음의 體用(체용)을 삼았다.”고 하였다. 주자는 이것을 周易(주역)의 寂感(적감) 두 글자로써 대체하여 드디어 천고의 마음을 말하는 妙詮(묘전)으로 삼았으니, 종밀이 유문에 끼친 공이 적지 않다고 할 만하다.

위의 내용 중에서 “知라는 한 글자가 뭇 신묘함의 문이다.” 라는 말은 荷澤神會(하택신회)(670~762)와 圭峰宗密(규봉종밀)(780~841)로 이어지는 荷澤宗(하택종)의 심성론과 관련된 핵심개념이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종밀은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의 심성론을 계승하여 중생심을 본체와 작용으로 설명하는데, 그는 이 知(지)를 본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智(지)는 작용이지만 知(지)는 작용이 아닌 본체이다. 그런데 종밀은 知(지)를 단순히 그저 본체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중생심의 본체 그 자체는 단지 空寂(공적)한 것으로 이해하며, 知를 그 본체상의 불변하는 작용으로 이해한다. 그는 知를 본체이면서도 작용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서포는 바로 이러한 관점을 주자가 유교의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포는 성리학의 형성에 종밀이 끼친 공이 적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이후의 성리학이 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성리학자들은 불학·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의 사대부들 중에는 佛敎(불교)를 학습한 사람이 대단히 많지만, (중략) 비록 인품에는 순후하거나 야박함이 있었고, 터득함에는 深淺(심천)이 있었다. 淸淨(청정)으로 本濟(본제)를 삼고, 定力(정력)을 발휘함으로써 言論(언론)을 삼아 政事(정사)에도 탁월하여 볼만함이 있었으니, 사대부의 禪學(선학)이 여기서 성행하였고 … .

정문의 여러 사람들은 선학에 감염되지 않음이 없는데, 주자는 여여숙을 가장 인정하였지만, 역시 그도 일찍이 선을 배웠다고 의심하였으니, 나머지는 알 만하다. 유광평은 스스로 말하기를, “만년에 불교를 배워 비로소 소득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정에게 배운 것은 지극하지 못했음을 말함이다.

위의 내용은, 성리학자들은 불학·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말하면서, 더욱 유광평과 같이 그 배운 사실을 스스로 솔직하게 밝히는 점을 높이 사는 입장이다.

더 나아가 그는 당시의 선학의 유행 정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정의 학문적 근원이 禪(선)에 있음을 주자의 언급으로부터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송나라의 사대부들은 禪學(선학)을 숭상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부녀자들도 왕왕 지혜로운 자가 있었다. 정자의 집안에도 지혜로운 여자가 많이 있었는데 아마 禪門(선문)에서 터득함이 있는 자이니라(朱子(주자)는 두 程(정)씨가 앞서 병이 들었다가 뒤에 나았다고 하였는데, 생각건대 병이 들었을 때는 대개 禪(선)을 말했던 것이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