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마을 뒤에 있는 호구산(虎丘山)에서 흘러 내려오는 영오고랑에는 폭포와 작은 못이 있다. 이 소(沼)에 용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용소리는 한자로는 용 용(龍) 늪 소(沼)를 사용하여 용이 사는 늪이 있는 마을이다. 용소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에 깊이 파인 웅덩이를 말하며 용이 사는 골짜기는 용추(龍湫)라고도 한다.

호구산에 있는 용문사(龍門寺)는 하동 쌍계사의 말사로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금산 보광사의 후신이다. 1660년에 남해 향교와 입구가 마주본다는 이유로 백월이 호구산으로 이전하여 용문사로 하였다고 한다. 후에 탐진당과 적묵당을 짓고 66년에 대웅전과 봉서루를 세우고 1708년까지 여러 전각을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들의 활약이 커 수구사금패와 연옥 등을 하사받은 호국사찰이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문화재로 지정된 명부전과 석불, 탐진당, 적묵당 축원당과 삼혈포 괘불 등이 유명하며 일주문에 들어서면 시원한 물소리와 호구산의 절경을 보기위해 가을 단풍철에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용소에 관한 전설은 대개 3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용이 살았다는 지형으로 물이 맑고 깊어 명주실꾸리를 다 넣어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는 등으로 못의 깊이를 부각한다. 둘째는 용이 승천하면서 만들어진 지형으로 큰 못에서 승천한 경우도 있지만 우물이나 시냇물에서 승천하면서 못이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셋째는 기우제를 지내는 공간으로 이는 용소가 비를 관장하는 용의 거주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명의 특성은 용이라는 동물을 신성시하는 민간 신앙과 일정한 연관이 있다. 

화계(花溪)리의 고유 지명은 곡포(曲浦)리 또는 곡해(曲海)라고 불리던 곳이다. 마을 앞에 목단도(牧丹島)라는 섬이 있어 화계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마을 뒷산에는 꽃이 많고 시내가 흐르는 곳이라고 한다. 곡포리는 굽을 곡(曲) 개 포(浦)자를 쓰며 주변 지형이 안으로 굽어 들어간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고유지명인 굽은개를 한자로 옮기면서 곡개, 곳개를 꽃 화(花) 시내 계(溪)자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을 한다. 

예부터 이곳에는 곡포보성(曲浦堡城)과 곡포창(曲浦倉)이 있었던 곳으로 마을의 동북쪽에 있었던 성현과 연계되어 남해안을 방어하는 조선 수군의 요해지였다. 따라서 이곳을 노리는 왜구들이 자주 침입을 해왔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수군을 배치하였지만 배를 접안할 수 있는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런 관계로 굴강(掘江, 굴항)을 만들어 전선과 병력을 숨겼다. 굴강은 바다에 접한 육지의 땅을 깊게 파고 주위에 나무를 심어 배를 숨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곳이다. 남해안에는 여러 곳에 굴강이 남아있고 관광자원으로도 활용이 되고 있다. 

용소, 신전, 화계리에 둘러싸인 바다를 앵강만이라고 부르고 마을을 지나 난음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앵강곡, 앵갱이고개라고 한다. 앵강만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연전에 앵강만 이름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밝힌 바가 있다. 요약하면 앵강만은 꾀꼬리 앵(鶯) 강 강(江)자를 쓰며 고유지명은 꾀꼬리 강이라는 뜻이다. 전해오는 설에는 산 고개에 꾀꼬리가 많았다. 바다가 큰 항아리처럼 생겨 큰 독 앵(甖)자를 따왔다. 복곡에서 와전되었다거나 연안(沿岸)이라는 뜻이다. 라고 하지만 모두가 생각일 뿐 근거가 없으며 앵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만 강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앵강은 꾀꼬리 강이며 고어로는 곳고리 강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강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곡포만이었다. 타 지역의 만 이름도 육지에 있는 지명에서 유래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곡포는 굴강을 파고 난 뒤에 곡굴강은 곶굴강이 되고 화계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 된 것을 보인다. 곡굴강은 곳고리 강이 되어 한자로 옮길 때 앵강만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전(薪田)리는 섶나무 신(薪) 밭 전(田)자를 쓰니 당연히 섶밭마을이다. 섶은 잡초보다는 커서 땔나무로 사용할 수 있는 억새나 키 작은 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섶 지고 불에 뛰어든다는 속담이 있고 중국의 춘추시대에 오나라의 부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불편한 섶 위에 누워 잠을 자며 복수를 다짐하여 월나라의 구천을 항복시켰으며, 싸움에 패한 구천은 쓸개의 쓴맛을 보며 복수를 다짐하여 다시 부차를 패배시켰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 

금평(錦坪)리는 금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비단 금(錦) 들 평(坪)자를 쓰며 옛날부터 가뭄이 들어도 금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르지 않아 농사를 잘 지을 수가 있어 복을 받은 골이라 하여 복곡(福谷), 복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주변에는 기와를 굽던 애골, 와야골, 지엣골이 있고 미륵뱅이가 있던 벅시골이 있었다.

원천(院川)리는 고을 원이 미조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해가 저물면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쉬어 가기위해 원을 지어 놓고 머물던 원사가 있었던 곳이다. 주변에 맑은 시내가 흐른다하여 원천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한자로는 원집 원(院) 내 천(川)자를 쓴다. 원집은 담을 친 관청이나 역원 등을 말하며 조선시대에는 여러 원들을 지어 활용되었다. 건물은 원우(院宇)라고 했다. 

원은 지방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원의 관리는 각 지방에서 맡았으나 관리의 소홀로 인해 폐지되는 경우도 많았다. 원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차차 그 기능이 상실되어 민간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이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로 인해 차차 원은 쇠락하여 그 기능을 역에 넘겨주거나 주막 또는 주점으로 바뀌었다.

미국마을은 지역특화발전법에 따라 자치단체에서 미국 교포들에게 건강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실질적인 인구 유입 효과를 얻기 위해 만든 곳이다. 기후가 온난하고 풍광이 좋으며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용소리 일원에 30억 원을 투입하여 7,500평 규모로 조성 되었다. 주택 21동과 복지회관 및 체육시설 등이 있으며 주택은 모두 목재구조로 한국에서 보기 힘든 모양이다. 따라서 미국의 작은 마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또한 미국의 전통주택을 체험할 수 있도록 주택에서는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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