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습니다. 아니 새날이 또 밝았습니다. 떠오르는 해야 어제와 다를 바 없지만, 새해 첫날은 시작의 의미와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기에 그 기운이 또한 평소와 다른 감회를 느끼게 해 줍니다. 지난해와 새해는 단 하루 상관이긴 하지만,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두면서 심중을 달래는 이러한 다짐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관점이 다 틀리므로 새로움의 여부를 객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어느 분은 단, 한순간에 깨달아 새로움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지극한 공덕이 있어도 새로움에 도달하는 과정이 더딜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닉네임으로 통용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풍습이 새해 새날을 여는 이미지로 남아돌고 있지만, 우리는 이 새로움을 잇기 위한 작용을 어떻게, 어떤 각오로 다지는가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여정에서 한편으로는 이 새롭다는 이 의미가 어떠한 과정의 이입없이 단지 해가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워진다는 언사가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견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그에 필적할 만한 변화의 정도가 모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새로워지기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이나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도 육신의 힘듦을 견디어내는 노정을 통하여 이루어내는 행보와 같은 것입니다. 물론 수련과 명상의 행보가 일취월장하여 특별한 단서가 없어도, 순간에서 번득이는 예지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예외이겠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행보 속에서 필자는 1월이 시작될 즈음, 정말 뜻밖에 아주 가까운 원로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그 분과의 인연이 특별하였던 차라 더욱 애도의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면상으로 그분과의 인연을 서술하지 않더라도 오래전 원로의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의 기억이 재삼 회자되었습니다. 물론 원로 선생님의 가르침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지만, 필자가 특히 감명을 받은 것은 그분의 집을 방문했을 때 집 안 거실에 걸려있는 세심(洗心)이라는 휘호였습니다. “세심(洗心) – 늘 마음을 새롭게 씻는다” 새롭다는 여정에서 매일매일 마음을 새로워지도록 닦아내어야 비로소 새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일 년 365일 매일매일 비워내고 닦아내어야 비로소 새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원로의 훈육이 스며있는 글 속에서 느낀 감회는 지금도 심금을 울릴 정도의 기세로 마음 한쪽에 남아돌고 있습니다. 

필자가 ‘세심(洗心)’을 서두에 올린 것은 새로워진다는 개념이 한갓 통설로만 그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자각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람은 물론 자연마저 점점 본래의 생명이 추구하는 새로움 자체의 원형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식의 새로움에 젖어든 인간의 무지가 이에 대한 처절한 참회와 반성 없이 형식의 새로움만으로 이 사회를 혼돈에 젖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입니다.  

오늘에 있어 우리가 새롭다는 느낌을 받을 유형에서 새로운 상품, 새로운 물건이 빗대어 그 느낌만으로 이전의 것이 아닌 아주 새롭게, 처음 접하는 외형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물건의 안을 들여보기도 전에 이미 새롭다는 인식을 외형의 형상으로 판별하고 마는 이른바 문명의 부산물이라 할 광고의 후유증입니다. 상품을 팔기 위한 수단에서 광고는 필수의 요건이지만, 여기에는 시각의 효과를 노린 측면에서 그 단점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그만큼 사고파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겉의 모습에만 심취함으로써 새로움이란 진의를 명확히 하는데 어려움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여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전에 없는 것들이 새롭게 포장되어 새롭다는 의미를 인위적으로 가식화하려는 수단에서 새로움은 이미 방향성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기존의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물건이나 상품에 새로움을 보장하는 풍습은 이미 사람의 무의식에게 까지 스며들어 사유화된 지 오래입니다. 

이러한 후유증은 정치, 교육, 문화, 예술, 종교, 상공농어업계 전반에 확산되어 진의와 진실, 참과 인간다움, 진리의 보편적 가치는 물론, 인간 정서에도 심대히 영향을 미치게 합니다. 어디가 새로움의 진(眞)이고 어디가 거짓인지 모를 정도로 새로움에 대한 주객이 뒤바뀌어져 있음은 물론 새 생명에 대한 고귀함마저 허물어지게 될 정도이니 가히 문명과 자본주의의 몰락은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낳습니다. 

그러한 인위적인 새로움을 담기 위해 행여나 자연을 훼손하고 공기의 질을 더럽히며 하늘과 땅을 고통스럽게 하고 나는 새, 바다 생물마저 숨쉬기 고통스럽게 만들고 각종 플라스틱류에 내장이 썩어 죽어가는 고기들을 보면서 어찌 사람만이 따스하게 입고 포만감에 젖기를 바라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때의 새로움이란 그야말로 거짓 새로움이며, 환상 속의 새로움입니다. 죽음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저 무서운 망상의 유혹입니다. 또한, 그것이 새로움을 포장한 욕망의 사슬이라면 이 가당찮은 새로움이란 포장을 거 둬 치어야만 제대로 된 새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멈춰 세우는 것, 죽임의 새로움을 새로운 새로움으로 회복하는 일 이것이 새해 새날 우리가 맞이해야 할 운수라면 어찌 한시라도 망설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유에서 필자는 다시 세심(洗心)으로 새날의 의미를 다져봅니다. 

새로움의 본질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위하여 허물을 닦아내는 과정에서 비로소 성사될 수 있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새로워짐에 천지가 새로워지고 산천초목마저 새로워지는 일이 정녕 새로움을 여는 길이자 인간 본연의 사명임을 명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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