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설흘산(雪屹山)의 옛 이름은 소흘산(所訖山)이었다. 소흘산이 언제부터 설흘산으로 바뀌었으며 무슨 이유로 바뀌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고 알려주는 자료도 없다. 지금의 설흘산은 가천의 다랭이마을과 함께 트래킹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남해의 멋진 풍광은 등산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명소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남쪽의 해안선은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우며 산정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장관이다.

소흘산의 기록은 조선 세종 30년(1448) 의정부에서 병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소나무를 사사로 베지 못하도록 입법을 하였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작벌(斫伐)하여 소나무가 거의 없어졌다. 지금 연해 주현(州縣)의 여러 섬과 곶(串)의 소나무가 잘되는 땅을 보니 남해 망소흘산(望所訖山) 장도(場島)등 전부터 소나무가 있는 곳은 나무하는 것을 엄금하고, 근처의 수령 만호로 하여금 감독 관리도록 하여 용도가 있을 때에 대비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곤남군편에는 봉화가 3곳이니 금산(錦山)은 남해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본도(本道) 소흘산(所屹山)에 응한다. 소흘산은 서쪽으로 망운산(望雲山)에 응한다. 망운산은 남해도 남쪽에 있다. 북쪽으로 진주 금양 부곡(金陽部曲)의 양둔(陽芚)에 응한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금산 봉수는 북쪽으로 진주 대방산(臺方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소흘산(所訖山) 및 원산에 응한다. 소흘산 봉수는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원산에 응한다. 원산 봉수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소흘산에 응한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주로 봉화와 소나무 관리에 관한 내용이지만 각종 지리지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역의 중심이 되는 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각종 지리지에 남아있는 소흘산의 기록을 살펴보면, 경남속찬지리지 所屹山(1437년), 왕조실록 望所訖山 所屹山(1448년), 동국여지승람 所訖山 봉수(1530년), 진주진관지 所屹山 봉수 (1786년), 남해읍지 雪屹山 재현남 30리 상유봉수(1899-1905년), 조선환여승람 雪訖山봉수(1990년(1910-1937실사조사), 남해군 향토지 所屹山(1933년), 남해군 행정지도 雪屹山으로 지명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각종지도에서의 소흘산의 표기를 보면, 광여도 所屹山 烽臺(1750년), 해동지도 所屹山(1750년), 비변사지도 所屹山 烽臺(1767년), 조선지도 所屹山 烽(1767-1776), 여지도 所屹山 여지도서 所屹山烽(1787-1789, 1757-1765), 청구도 所乙山 (1834년), 대동여지도 所屹山(1861년), 군현지도 所屹山 烽臺(1872년), 청구요람 所乙山(1895년), 읍지부도 所屹山 烽(1899년)이 있다.

기록으로 보면 소흘산은 조선초기에는 所屹山과 所訖山이 혼돈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자의 뜻 보다는 소리를 차용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소흘산이 설흘산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기록으로는 알 수가 없지만 1900년 발간된 남해읍지에 설흘산의 기록이 처음 나온 것으로 보아 그 즈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1914년 일제가 행정 구역을 개편 하면서 진행된 창지개명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소흘산은 전국에 여러 곳에 있다. 포천에 있는 소흘산(蘇屹山)은 주위에 산이 많고 나무와 풀이 무성하다고 해서 소흘산이라 했으며 소흘읍도 있다. 고성에 있는 소흘산(蔬屹山)은 소플산 소풀산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진천에 있는 소흘산(所訖山)은 솔산에서 유래하였으나 봉수대가 있어 봉화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칠곡에 있는 소흘산(所屹山)은 所乙山, 所屹山, 所月山 所訖山 등으로 기록이 남아있고, 밀양에 있는 소월산(所月山)은 백마산 정상부위가 반달 모양이 된 것에서 유래하여 바드리. 바달리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왕조실록에는 소흘포(所訖浦) 솔곶이(所屹串)등의 지명이 남아있고 지금도 제주 삼양동의 所訖浦, 설개, 所訖村이 있고 전라도 고흥에도 소흘포가 있었다. 

앞에서 소흘산은 한자의 뜻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소리를 빌려 온 것으로 본다고 설명을 하였는데 조선초기에는 소흘을 어떻게 읽었을까? 조선시대에 발간한 농사직설과 훈몽자회에 소흘라(所訖羅)를 적어놓고 한자로 써레 파(杷)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소흘은 써래로 읽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전에 있는 내용을 빌려오면 써레의 옛말인 서흐레는 16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근대 국어 시기에 제1음절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변하는 어두 된소리화를 거쳐 18세기에는 써흐레 형태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18세기에 ㅅ의 된소리를 ㅄ으로 표기한 흐레의 예도 보인다. 써흐레에서 ㅎ이 탈락하여 써으레’ 되고, 여기서 다시 모음 ㅡ가 탈락하여 19세기에는 현대 국어와 같은 써레 형태가 등장하게 되었다. 고 설명을 하고 있다.

써레는 쓰레(경기), 써리(경남), 써으리(전남), 써그레(강원)등으로 불리며, 농사직설(農事直說)에서는 목작(木斫), 소흘라(所訖羅)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해동농서(海東農書),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는 한자로 파(耙)라고 적고 있다. 써레는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누구나 사용해 본 경험이 있는 농기구로 긴 토막나무에 끝이 뾰족한 이를 6~10개 빗살처럼 나란히 박고 위에는 손잡이를 가로로 댄 것이다. 논에서 쓰는 것을 무논써레, 밭에서 쓰는 것을 마른써레라고 달리 부르며 땅의 흙을 부수거나 고르는 기구이다. 

제주도 삼양동에는 서흘개가 있다. 서흘은 제주토속어의 설덕과 같은 말로 돌들이 엉성하게 쌓이고 잡초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서흘개의 옛 지명은 소흘포였다. 전국 여러 곳에 있는 써리봉, 서리봉, 솔산, 솔봉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이상의 몇 가지 사례로 보아 소흘산은 서흘산으로 읽혔을 가능성이 많고 서흘은 다시 설흘로 바뀐 것으로 추정을 해본다. 하지만 처음 지명을 지을 때는 소흘산을 소리로 읽지 않고 이두식으로 읽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소흘산을 뜻으로 읽었다는 내용을 정리해보면 바 소(所)는 ...바와 곳이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이를 흘(訖)은 이르다 다다르다는 뜻이므로 어떤 곳에 다다른 산이라는 의미이고 우뚝할 흘(屹)자를 쓰면 우뚝 솟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두 글자를 뜻으로 읽으면 바닿산, 바달산이 되며 이는 우리의 고유사상인 배달과 연관이 있음을 유추할 수가 있다. 배달이라는 말은 자연히 단군과 연결이 되며 우리말의 박달(朴達), 백달(白達)도 배달에서 유래한 말이다.

박달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다. 1) 박달은 밝다에서 파생되어 밝은 땅이라는 뜻이다. 2) 박달은 박치기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에서 파생되어 머리 산이라는 뜻이다. 3) 박달은 안과 밖에 근거를 두고 있어 중심부에서 볼 때 밖이라고 하여 바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흘산은 이 세 가지가 부합되어 사방이 확트인 밝은 산이며, 바다에 맞닿은 끝 산이며, 땅의 바깥에 있는 산이니 감히 박달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산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 정지장군이 관음포 전투에서 왜적을 섬멸한 박두양은 이곳 박두산의 바다가 아닐까가? 소흘산 중턱에 있는 삼각산에 일본이 정기를 뺏기 위해 불을 뜬 이유가 궁금해진다. 북한에 있는 구월산의 옛 이름은 박달이라고 하며, 박달은 바라다 에서 유래하여 발, 밝은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왕조실록에 남아있는 망소흘산이 우리의 의구심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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