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호 남해스마트관광택시
정길호 남해스마트관광택시

1973년 6월 22일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는 자연적으로 생긴 섬 남해군을 육지와 연결해 준 다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세계 최고 현수교인 금문교를 본떠서 만들었다. 길이 660m 폭 12m 동양 최대의 현수교였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올해로 50년이 되었다. 긴 세월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버틴 탓에 보수 공수 후 대형 타량은 새 다리를 이용하고 있다. 남해대교를 개통하는 날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와서 다리가 무너질까 봐 교통정리를 할 정도였다 한다. 인기는 물론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신혼여행을 비롯해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관광지로 각광을 받아 남해대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등 추억을 남기는 장소이기도 했다. 

나 역시 집사람과 결혼식을 서울에서 올리고 남해의 집으로 올 적에 차에서 내려 다리를 한참동안 걸으면서 추억사진을 찍었다. 지금 사진을 넘겨 보니 세월이 많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자랑스러운 다리이지만 조금 아쉬운 점은 완전한 우리 기술이 아니라 일본과 합작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시절 자본도 많이 부족하고 어려운 시기였으니 이해가 간다. 

남해 노량과 하동 노량을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장소는 지금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노량: 죽음의 바다’ 격전지이다. 1598년 음력 11월 18일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인 곳, 노량에서의 대첩은 세계 최대의 해전이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처음 모신 충렬사가 남해대교와 가까운 곳에 있다. 현재는 충남 아산 현충원으로 이장한 후 가묘만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기일이 되면 남해군에서 제사를 지내고 큰 행사로 받들고 있다. 

남해대교 개통 후 남해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관광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1975년 해태제과에서 휴게개념 모델로 건축한 남해각은 숙박시설 등 휴식공간이 되었다. 2020년 추억이야기, 신문자료, 각종 사진 등을 전시하여 50년 역사를 재조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도 한번 구경을 갔다. 과거 신혼부부가 남해대교 앞에서 찍은 사진과 지금 찍은 사진을 나란히 전시하여 인상 깊었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인 남해대교 글귀와 해태상은 긴 역사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1973년 개통된 남해대교 건설 배경과 모든 과정은 무척 힘든 고비가 많았다. 최치환 의원 유세장에서 어느 한 노인이 남해다리가 생기면 내 손에 장을 지지고 눈을 빼라고 한 내용들이 등장할 만큼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 뒤 그 노인의 눈이 빠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프닝도 많았던 속에도 남해대교는 개통됐다. 

경남 남해안에는 섬이 많다. 그중에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남해도가 큰 섬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유배지로 손꼽히는 섬들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서포 김만중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유배객이 스쳐 간 곳이 남해도이다. 과거 궁중음식이 유명했다고 전한다. 섬은 육지와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배편이 아니면 갈 수가 없는 곳이다. 학교에 가려면 배를 타야 하고 풍랑이 있는 날은 갈 수가 없는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는 곳이 섬이다. 또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삶에 어려움과 고충이 많았던 섬사람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남해에도 보리고개가 있었다. 바다해초, 산나물,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생명을 유지했다던 말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림 60 -40.  정길호작 남해대교풍광
그림 60 -40. 정길호작 남해대교풍광

남해 인구 15만 명 시대 민생고 해결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과정에서도 부모의 마음은 남달랐다. 나는 못배웠어도 자식만큼은 가르쳐 고생 안시키려고 허리띠를 졸라매었고 딸자식은 일찍 전답 많은 집으로 시집을 보내 배곯지 않게 했던 그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남해에 다리를 놓기 위해 고군분투 노력한 두 분이 계셨다. 섬놈이라는 말이 듣기 싫었고 육지로 만들어 잘 살기 위한 최대의 수단이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금암 최치환, 청남 신동관 두 분은 남해대교 건설 추진부터 착공, 개통까지 눈물을 많이 흘린 어르신이다. 세월이 흐르면 지워지기 쉬운 것이 역사이다. 지금부터 두 분의 노고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하고자 한다. 나 또한 나이 70이 다 되어 간다. 이번 개통 50주년을 맞이하여 서툴지만 자료를 수집해 남해군민들과 함께 역사공부를 하기 위해 펜을 잡았다. 

1964년 7월 박정희 대통령께서 진해 저도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당시 청와대 경호과장으로 경호를 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신 과장, 남해가 고향인데 잠시 다녀 오시지요’ 하는 말씀에 신동관 경호과장은 ‘남해는 다리가 없어 배로 건너야 합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잦아 남해군민들이 육지로 오려면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각하 남해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 주십시오. 무장공비가 자주 침투하고 있어 작전상 병력이 투입되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있으며 휴가병들이 날씨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해 귀대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면서 대교 건설의 중요성을 설명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 후 1963년 11월 26일 민주공화당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최치환 의원은 잘 사는 남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차 1965년 4월 12일 남해대교 건설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남해로 초청해 현장을 직접 보여 드리고 뛰어난 말솜씨와 패기를 바탕으로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때 당시 때마침 남해안과 진해를 순시 중이던 대통령을 모시고 해군 함정으로 미조항에 도착, 수행원과 청와대 비서실장, 교통부장관, 해군참모창장과 함께 남해읍으로 향했다. 읍까지 가는 연도변에 농사일을 하던 군민들이 농기구를 든 채 손을 흔들면서 환영을 하였다. 시골의 순박한 섬 사람들의 환대에 감사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선거 때 전폭적인 지지에 늘 감사하고 있었다. 

또한 금암 최치환 의원과 신동관 의원은 한국 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우고 태극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1960년 초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79달러로 세계 최하위였다. 남해대교 총공사비는 18억7000만 원, 경부고속도로 429억 원의 4.5%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당시 쌀 한가마 1만1500원, 공무원 월급 1만5000원이던 시절, 두 분의 힘은 남해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인새에도 삼박자가 있다. 삼박자가 딱 맞아 큰 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지금은 세분 모두 하늘에서 영면해 계신다. 이번 남해대교 50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남해 사람들이 살아온 애환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남해 보물섬이 대한민국 관광 1번지로 거듭나고 아름다운 섬으로 사랑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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