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식​​​​​​​역사문화관광자원봉사자
고영식
​​​​​​​​​​​​​​역사문화관광자원봉사자

엄마는 섬(강화도)에서 나와 바다 위 배 안에서 품고 있던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명(兒名)이 선생(船生)이다. 아이가 성장하여 53세가 되던 해 그는 섬(노도)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죽었다.

섬은 바다를 품고 삿갓처럼 엎드려 있다. 서포(西浦)의 섬 노도(櫓島)이다. 남해군 상주면 백련리 앞 바다 건너 삿갓처럼 생긴 섬이다. 서포 김만중이 3년간(1689년~1692년) 유배 생활을 하였던 유형(流刑)의 땅이다.

서포 김만중. 조선조 숙종임금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문인이다. 그는 권세있는 조선조 명문거족의 자손이다. 그러나 병자호란기 아버지를 여윈 후로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는 배를 짜고 수를 놓아 받은 삯으로 자식들을 기르며 교육시켰다. 이러한 어머니의 지극정성과 가르침은 일생의 지표가 되었다. 29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임금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지경연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역정은 순탄하지를 못했다. 임진, 병자의 전란을 겪은 후 당쟁은 더욱 치열하였다. 대쪽 같은 성정으로 정쟁에 휘말려 세 차례의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끝내는 귀양지에서 불귀의 객이 된다. 우리가 그의 이름 석 자를 알게 된 것은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구운몽’을 통해서 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남해 사람들은 서포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남해에서 생을 마감하였기에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은 크고, 출천(出天)의 효(孝)와 충(忠)으로 이름난 그는 존경의 대상이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는 능절의 미학이요, 천의무봉의 걸작이라 극찬한다. 

서포를 만나기 위해 차를 달린다. 백련마을에 도착하니 저만치 노도가 잡힐 듯 다가온다. 섬은 언제나 고즈넉하면서도 역동적이다. 파도가 들고 날 때마다 서포의 울림을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낸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숙종임금에 대한 원망과 질타.

노도에서는 ‘김만중 문학의 섬’이 조성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백련과 노도를 왕복하는 뱃전에 몸을 실었다. 10분이 채 안 걸려 노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한다. 서포의 초옥까지는 20여 분이 걸린다.

섬의 허리를 가로질러 난 산길을 따라 걷는다. 주변 경관이 바다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경관이 아름답다. 바다는 절경을 빚어내는 마술사다. 길 따라 걷다 보니 이정표가 나온다. 갈림길이다. 오른편 위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서포가 묻혔던 묘터가 나온다. 봉분도 없는 묏자리는 서포의 유해가 5개월 동안 묻혔던 곳이다.

서포의 책
서포의 책

서포는 죽기 전 사방이 툭 트인 이곳에 직접 묘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유해는 그 후 유족들에 의해 이장되었다. 서포의 한이 맺힌 곳이라 그러한가, 이곳에는 그가 죽은 지 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무나 풀이 자라지 않는다.

서포의 초옥은 동백 숲에 둘러싸여 있다. 초옥 옆에 쭈그려 앉은 우물은 주인을 잃고 폐정이 된지 오래다. 서포선생이 직접 팠다고 하는데 주인이 가고 나니 샘도 알고 물길을 끊는가 보다. 여인의 치마폭에 쌓인 임금의 귀에는 충신의 간언은 한갓 비위를 거스리는 역린이었던가.

조선의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섬 중의 섬, 오지 중의 오지에 위리안치를 시키다니…. 

한양에서 천리길을 떠나 하동 노량에서 뱃길로 절해고도인 남해 섬을 거쳐 이곳 노도로 유배를 당한 서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 때나마 조카사위였던 임금은 그리도 야속하였던가. 차라리 정쟁에서 한발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는 자세로 살았다면 일생이 온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으리라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서포는 절망의 적소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끝내 나라님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56세의 나이로 병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배지에서 솔잎과 피죽으로 연명하며,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구운몽’은 평안도 선천 유배시에 어머니를 위해 집필하였다고 한다. ‘사씨남정기’는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맞이한 숙종임금의 비행을 꾸짖고 회개시키기 위해 쓴 목적소설이다.

한편 유배기간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부음을 들은 만중은 마루에서 굴러떨어지며 혼절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듯하다. 서포는 죽기 전에 어머니의 생애를 칭송하는 ‘정경부인 윤씨행장’이란 글을 남겼다. 글 말미에 ‘불초자(不肖子) 고애남(孤哀男) 만중은 피를 토하고 울며 삼가 짓는다.’라고 썼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려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 이미 흥건하네

몇 번이나 붓 적셨다가 도로 던져 버렸다

문집에서 남해에서 쓴 시는 응당 빠지겠네

어머니의 생신일에 유배지에서 쓴 사친시(思親詩)이다.

서포는 우리 국문학사에 큰 획을 긋고, 한글 소설로 유배문학의 꽃을 피운 사람이다. 그는 한글을 사랑한 애국자이며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조 3대 고전 문학가로 꼽힌다. 

서포의 한이 서린 노도를 떠나려니 발걸음은 무겁고 마음은 애잔하다.

“옛날에 노자 묵고 할배가 있었다” 산등성이에서 한양땅 어머니를 그리며 멍하니 앉아 있었을 서포를 두고 섬사람들이 조상 때부터 해 오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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