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특징이라 할 선선한 기후가 지나가고,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몸과 마음을 엄습합니다. 이런 날씨를 보면 가을이 어느 정도 우리 곁에 머물다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딱히 초겨울이라 명명하지 않더라도 늦가을의 정취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를 엮어낼 11월, 이때쯤이면 예나 지금이나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행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조상을 기리는 시제(時祭)나 시향(時享)을 모시는 일입니다. 선대 조상을 모신다는 차원에서 시제, 시향은 조상의 얼을 계승하고 기린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담아 온 효행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풍습도 차츰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하는 것은 흔치 않은 오늘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한편 일체 중심이 나에게로 귀결된다는 의지를 수용할 만큼 내재한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 동안 통상적인 제례의 풍습이 굳건히 자리매김한 탓에 변화의 정도가 그리 쉽게 용인되지 않을 것입니다. 긴 세월 동안 각고의 정성과 헌신과 소원한 바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깊게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열정을 지금에 와서 도외시해서도 안 될 것이지만, 변화의 축 또한 거부해서도 안 되리라는 것이 세상 질서에 부합하는 행보라면 이 양자에서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을지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변화의 조짐은 조상의 얼을 기리는 차원을 넘어 나의 중심적 가치나 정신이 무엇이며 또,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면 문명사 전체를 아우르는 발상 전환 자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나를 운용하는 기점에서 나는 하늘이 열리고 땅이 생겨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억만년이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로부터 억만년이 나에게 이르러 끝이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내가 없으면 조상의 존재는 물론이고 생명 진화의 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모시는 것을 정의하는데 다만 선대 조상의 위폐를 벽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아니면 선대 조상의 성령이 깃들어 있는 나를 향하여 위를 둘 것이냐(向我設位)에 대한 선험적 탐구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세상에 나타나기에는 아직은 시기상조이기는 하나, 나의 전세(前世)는 현재 나의 몸과 마음을 이끄는 의식과 근육과 세포, 뼈와 혈, 수분의 작용 안에 전 생애와 선대 조상의 숨결이 있다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중심으로 나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로 이어지는 조상의 숨결은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마음과 몸에 깃들어져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형상이 나에게로 와서 나에게 보존되어 있다가 내가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는 형국이라면 나 쪽으로 위(位)를 설하는 방식이 오히려 진일보한 의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선대를 기리든 후대를 기리든 나를 밝히는 여정에서 형식적인 의식을 배제하자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조상을 모시는데 많은 재물을 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 한 그릇의 정화수라도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도 섬김의 예를 다 하였다고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필자가 정화수를 이야기하였습니다만 그 옛날 어머니와 할머니가 장독대 위에 맑은 물을 떠 놓고 조상님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그 자체에서 풍기는 정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특히 물이 가진 상징성에서 만물이 화생하는 근본이자 생명수로서의 물이요, 이 물은 상선낙수(上善若水)와 같은 교훈으로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는 점에서 명확한 조상 섬김의 간결하면서도 의미 있는 행보라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물을 대신한 간편한 의식으로 정화수 한 그릇이면 족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예고나 하듯 요즈음 세간의 화두는 제례를 지낼 때 음식을 얼마나 하느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물론 전체가 당장 이러한 방식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을 아예 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고, 참석하는 사람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차리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형국에 향후 제례 방식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형국으로 보면 모든 절차가 점점 단순화되어 가는 추세라는 점을 고려하여 향아설위(向我設位)와 같은 가장 효율적인 제례 방식을 눈여겨보는 것도 시향의 계절에 맞이할 우리의 다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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