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우형리는 우형동리로 불리던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소를 닮았다고 하여 지은 지명이라고 한다. 마을 뒷산은 송아지 다섯 마리가 뛰어가는 형상이라 오독산이라 하고 천상사 안쪽에 있는 등은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라 우왓등(牛臥嶝)이라 불러 소에 관한 지명이 많은 곳이며 맞은편에는 우지막골이라는 마을도 있었다. 그러나 구글 지도를 보면 마을의 형태가 소를 닮았다는 것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우형리는 소 우(牛) 꼴 형(形)자를 쓴다. 당연히 우리말은 소꼴 마을 이다. 쇠꼴은 소 모양으로 풀이 할 수 있지만 소를 먹이는 꼴(소먹이 풀)을 뜻하기도 한다. 경기도 파주시 금곡리에 있는 우형마을은 쇠먹이 풀이 많은 산골동네로 쇠꼴에서 유래하였다고 설명을 하고 있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형리에는 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와 율곡 선생을 모시는 율곡사라는 사당이 있다. 마을 회관 앞에는 신흥사 삼층 석탑이 있지만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당항리는 오래된 지명으로 당나라 당(唐) 목 항(項)을 쓰며 신당(神堂)의 길목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지만 한자와는 맞지 않는 지명이다. 창선면에 있는 당항은 집 당(堂)자를 쓰고 신당으로 가는 목이라고 하며, 고성에 있는 당항은 당항포(堂項浦)에서 유래 했지만 마땅할 당(當)자를 쓰고 지형이 닭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닭목에서 와전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나라 당(唐)자는 뜻을 빌려온 것이 아니고 소리를 빌려 온 글자로 보인다.

두곡리는 말 두(斗) 골 곡(谷)자를 쓰며 옛날부터 쇠를 가공하던 곳이라 하여 전동(煎銅), 점동(店洞)이라 불렀다는 설과 조선말에는 마을의 지형이 곡식을 헤아리는 말(斗)과 같아서 두곡이라 했다거나 곡식을 헤아리는 말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지명의 연관성을 보면 두곡은 말 여울, 말울. 말실, 말골로 읽어 말(馬)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보인다. 전국에는 두곡이라 불리는 지명이 많이 있다. 그들 지명의 한자표기는 두(杜,豆,斗)자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고유어로 두메산골, 말, 마을, 크다와 같은 다양한 뜻과 연관이 있다. 

점동리는 가게 점(店) 마을 동(洞)자를 쓴다. 점은 가게라는 뜻으로 지금도 점방(店房), 점포(店鋪) 상점(商店)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로 물건을 쌓아 두고 파는 곳이어서 장소가 넓어 조선 시대에는 숙소로 빌려 쓰기도 하였다. 

고진곡은 두곡과 당항마을 사이에 있는 고개로 예 고(古) 둔 진(鎭) 골 곡(谷)자를 쓰는 마을로 옛날 진성이 있던 마을이다. 고진성은 옛날에는 우고개보로 불리던 곳이다. 우고개보(牛古介堡)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으며 둘레가 9백 13척이다. 권관을 두어 성을 지켰으며 가정 임오년에 우고개보를 혁파하고 성고개(城高介) 곡포보에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지역을 방비하는 요처이었음을 확인 할 수가 있다.

우고개보는 소 우(牛) 예 고(古) 끼일 개(介)자를 쓴다. 우는 소를 의미하거나 낮은 곳을 의미하며 고개는 한자를 임차한 것이다. 따라서 우고개는 소가 넘어 다니거나 낮은 고개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형마을이나 우지막동, 우왓등이란 지명이 소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보나 진은 고려나 조선 시대에 국경지역에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파악하고 방어하는 기지의 역할을 하던 곳으로 북방 지역과 남방지역에 많이 설치되었던 군사 기지이다.

홍덕리는 넓을 홍(弘) 덕 덕(德)자를 쓴다. 한자의 뜻은 크고 넓은 덕이 있는 마을이다. 어릴 적 에는 홍들정으로 들리던 지명이다. 옛날에 홍덕정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홍덕(弘德))은 철종의 대왕대비 존호이었음으로 함부로 쓰지 못하는 지명이기도 하였다.

남서대로 770-16에 위치한 율곡사는 1964년 향약계원이 중심이 되어 율곡 이이의 향약을 계승하고 제례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곳에 있는 향약계는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4대 정신을 잇고 권선징악의 풍속을 계승하고 기강을 세워 면행정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하부조직이다. 남해에 남아있는 유일한 향약계로 정조8년(1784)에 시작하여 매년 양력 4월 15일 춘향다례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현령하달절목11통, 향약기본 운영방침규정, 임원명단, 등 관련 문서30여종을 보관하고 있다. 이는 그 시대의 향약과 관아의 관계, 계의 구성과 운영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을 받고 있다 2008년에 정비를 하여 관리사, 석담재, 제기고, 숙헌재 부속건물이 있다.  

죽전리는 대 죽(竹) 밭 전(田)자를 쓰니 당연히 대밭 마을이다. 비교적 늦게 형성된 마을로 임란이 끝난 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변의 지형이 봉황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 하며 봉황은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하여 대나무를 심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잠을 자지 않는다하여 오동나무를 심어 마을의 동북쪽 골짜기는 오곡으로 불리고 본 마을은 대밭 골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향교가 있어 행교동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양지마을은 죽전리 보다 먼저 생긴 마을 지명으로 마을 뒤에 명봉암이라는 바위가 있어 봉이 명산에 살면서 아침 이슬을 받아먹고 살며 명산에서 운다고 하여 볕 양(陽)자를 따서 지었다고 하나 마을이 산을 등지고 정남으로 향한 지역에 있어 양지라고 한 것이라 생각한다. 원래 지명은 양지변리였다. 볕 양(陽) 땅 지(地) 가 변(邊) 마을 리(里) 자를 쓴다. 당연히 햇볕이 바른 양지편이라는 의미이다. 

율곡마을은 밤 율(栗) 골 곡(谷)자를 쓴다. 우리말 지명은 밤숯골, 밤숙골, 밤시밭골로 불리는 곳으로 밤나무가 많은 마을이며 옛날에는 숯을 굽는 자리가 여러 곳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밤숯골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만 마을에서 옛날 도자기와 생활용품이 발견되어 피난처로 추정하기도 한다. 전국에는 율곡리가 여러 곳에 있으며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가문 세거지인 경기도 파평면의 율곡리도 밤나무가 많은 마을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이의 호가 율곡인 것도 그가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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