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평산포는 옛 지리지에는 평산, 평산포, 평산현, 평산포영, 평산폐현, 평서산, 서평으로 불리던 곳이다. 신라시대부터 서쪽 대양을 지키는 군사 요충지 이었으며 남해군의 전신인 전야산군의 영현이었다. 신라의 평서산현은 일명 서평이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가야나 신라의 서쪽 국경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본래 신라 초기에 평서산현(平西山縣) 또는 서평현(西平縣)이었으나, 경덕왕 때 평산현으로 고쳐 남해군(南海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지에도 평산폐현은 현 남쪽 25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 왜구의 침입으로 이 지역이 폐허가 되기도 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라좌수영을 방어하는 외곽 방어기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재하는 평산포영(平山浦營)으로서 둘레가 1,500척이 넘는 석성이 있었으며, 남쪽 소흘산(所訖山)의 봉수가 전라남도 여수의 돌산도(突山島)와 연결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의 해상작전에 중간 연락기지로 큰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남면 평산리는 지형 상으로는 비교적 가파른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동북쪽의 오리천(五里川)이 만든 넓은 들이 아닌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예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아 초기부터 군사취락의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본다. 하지만 현을 다스리는 현성으로서의 위치는 적합하지 않아 오히려 고진곡에 있었던 성이 현성이었을 가능도 있다. 평산리의 육상교통은 둔전리의 가파른 고갯길인 고실치를 넘어 남해현청(南海縣廳)과 연결되었다. 따라서 돌산도나 전라 좌수영 지역과 뱃길로 내왕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을 한다.

평산포리는 평산개, 산해라고 불리던 곳으로 평평할 평(平) 뫼 산(山) 개 포(浦)자를 쓴다. 그대로 풀이하면 평평한 산 포구이지만 평자는 다스린다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서쪽에 있는 산을 아우른 지역을 다스리는 포구로 보는 것이 옳다. 산해는 뫼 산(山) 바다 해(海)자를 쓰니 산과 같은 바다나 바다 같은 산의 의미지만 육지에서 파도치는 대양을 바라보면 바다도 산과 같아 보이지 않을까 싶다. 전국에는 평산리가 여러 곳에 있지만 대부분이 내륙에 있는 지명이며 바닷가에 있는 지명은 남해가 유일하다.

유구마을은 놋쇠 유(鍮) 아홉 구(九)자를 쓰며 마을 주변에 매몰된 유기가 많이 발견 되어 당시 주민들이 놋금(鍮金)이라 이라고 부르다가 뒤에 유구로 바꾸었다고 한다. 우리말 지명은 놋금 놋기미이다. 놋쇠는 자연동에 아연을 합금하여 그릇이나 장식품을 만드는 금속으로 고려 시대부터 많이 이용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나라에서 주관하여 물품을 만들었다. 놋쇠로 만든 것을 유기라 하며 방짜유기가 유명하다. 

발견된 유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누가 어떤 이유로 유기를 묻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나라가 어려운 시절에 난을 피하여 타지로 갈 때 유기를 묻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유구마을은 바다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서 지명과의 연관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마을 앞에 있는 유구만의 포구 형태가 안으로 들어간 형태이기 때문에 구미가 붙여진 것으로 추정을 하며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구미는 금이나 기미로 변하기도 하다.

오리정리는 옛날에는 현의 중심에서 오리마다 이정표를 세워 거리를 표시했는데 홍덕정에서 평산 까지 거리가 십리인데 중간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다섯 오(五) 마을 리(里) 길 정(程)자를 쓴다. 전북 남원에 있는 오리정은 전주와 남원 간의 국도변에 위치하며 춘향전에서 춘향이 이몽룡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별을 한 곳으로 오리의 정표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세워 오리정(五里亭)으로 표기하여 정자가 있는 지명이다.

지금은 없어진 우지막동리는 우지막(牛之幕)골에 있었던 마을로 소 우(牛) 어조사 지(之) 막사 막(幕) 마을 동(洞) 마을 리(里)자를 쓰며 풀이하면 쇠막 마을이다. 막은 오두막, 원두막, 움막, 초막과 같이 겨우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있었던 마을을 의미하며, 키우는 가축이 없어지자 주민들도 다른 곳으로 이주해 마을이 없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남면 평산리 망기산의 우지막골에는 수백 년간 백정승의 묘라고 전해 내려오는 묘가 있다. 봉분 주위에는 평평한 긴 바위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바닥에는 자연석을 깔았다. 묘지 주위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쌓은 석축이 있다. 봉분을 쌓아 올린 돌이나 주변 담장을 쌓은 수법이 고려시대의 성곽 축조법과 비슷해 그 시대의 기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에 위치한 남해 전 백이정 묘(南海 傳 白頤正 墓)는 고려 후기의 유학자인 이재(彛齋) 백이정(1247∼1323) 선생의 묘소이다.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155호 전 백이정 묘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허물어진 봉분과 석축을 복원시킨 것이며 선생의 위패는 이동면 난음리 난곡사에 모셔져 있다.

남면로 1534-110 (평산리 888-4)에는 경상남도 민간정원 제1호로 등록된 섬이 정원이 있다. 섬이정원은 차명호 대표가 2007년도부터 이곳의 다랭이논을 연못과 분수가 어우러진 정원으로 조성하여 2016년 정원 법에 따라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총면적 15000㎡에 조성한 섬이 정원의 주변은 고동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한려해상공원의 아름다운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다랭이논의 오래된 돌담과 울타리에 연출된 다양한 초본과 억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논의 높낮이를 이용하여 돌담정원, 덤벙 정원, 숨바꼭질정원 등 11개의 작은 정원들이 나눠져 있어 사진으로 연출하기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2020년 경남도에서 선정한 힐링관광 18선에 선정되기도 한 섬이정원은 유구마을에서 바다를 등지고 언덕을 20분 오르면 자동차 한 대가 오가는 비포장 길 끝자락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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