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가을바람이 10월 남해의 산야(山野)를 적십니다. 사계절 내내 부는 바람이 각기 특색이 있다고 하지만, 가을바람만큼 산야를 쾌적하게 해주는 바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 쾌적함과 신선함에 여름 더위에 지친 생기를 되찾고, 내면에 무심(無心)의 바람마저 일으킬 기세이니, 가을바람의 역동성을 어찌 예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잦은 생각과 감정에 얼룩진 내심을 정화하고도 남을 가을바람에 감사를 느끼며, 여느 날처럼 동네 앞 농로(農路)를 거닙니다. 고요에 물든 농촌 들판은 아직 추수하지 않은 벼 이삭이 가을바람에 출렁이고, 어떤 때는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또 어떤 때는 고요에 이르길 수회, 마침내 평온함에 젖은 바람결은 완연히 명상의 극치에 이른 듯합니다. 

이에 뒤질세라 필자 역시 동(動)과 정(靜)의 동선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쫓다 문득 심연의 세계에 몰입하는데. 그 여운에 동화된 가을 미풍이 다가와 살며시 미소를 짓습니다. 그 미소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살펴볼 즈음, 농로 양 끝자락에서 펼쳐지는 두 형상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신선한지 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필자의 시야에 들어온 그 모습은 가을바람마저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할 아이와 할머니의 만남이었습니다. 마치 한 생애의 시작과 한 생애의 마무리 아니 어쩌면 시작과 동시에 끝이 함께 하는 동시적 만남에 형용할 수 없는 지혜가 스며있음을 체감하며. 양방향을 나누어 한쪽은 아이가, 또 한쪽은 할머니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서로의 손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아이의 뒤뚱뒤뚱한 걸음에 고무된 듯 할머니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지르는데 “아이고! 이런 예쁜 아이를 보았나. 이리 오이라, 이 할미가 한번 안아보자.” 할머니의 얼굴에 담긴 밝은 표정과 미소에 가을바람도 웃음을 띠며 조우를 반깁니다. 아이 역시 반면에 미소를 남기며 할머니의 품속으로 미끄러지듯 안깁니다. “이 할미가 일하다 와서 땀 냄새가 날긴데, 처음 보아 낯설긴데, 그래도 얼굴 안 가리고 이렇게 안기는구나, 아이고! 우리 이쁜이, 우리 이쁜이.” 할머니의 넉살에 아이는 연신 웃음을 띠며 화답하는데, 처음 만난 인연이 이렇듯 거리낌 없이 마음을 나누는 모습이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처음 본 이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안기는 아이의 순진 무구함, 그리고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어 안은 할머니의 연륜, 이 사이에 어찌 거리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딱히 만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아이의 성품과 할머니의 성정을 알아차릴 시간이 전혀 없었음에도 처음 만남이 무색할 정도의 마음 길이 이렇듯 따뜻하게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마음길, 형체도 실체도 없는 거기에 무엇이 있길래, 이리도 따뜻하게 조우가 가능할까요. 이 친밀한 정서에서 행여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물질과 물질 사이에도 사랑의 공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 아닐까요. 

이런 덕담이야 누구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그리고 늘 보는 익숙한 사람 사이에서 얼마나 사랑과 감사를 담아내느냐에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들어있다면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보면 어떨까요. 할머니와 아이의 만남도 이러한 사랑이 깃든 만남이라는 점에서 아! 사랑은 어느 곳이든 존재하지 않음이 없이 언제든 찾아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마음 길을 되돌아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체가 얼마나 깊숙이 우리 생활에 반영되고 있는가는 여러 사례를 통하여 공유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점에서 종종 회자하는 사랑에 담긴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필자가 기억하는 가을 사랑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우던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는데, 할머니와 감나무는 수년 동안 사랑으로 교감하며 서로를 아끼며 친근한 벗이 될 정도였습니다. 할머니의 정성이 얼마나 갸륵했던지, 해를 거르는 일도 없이 해마다 가을이면 풍성한 감이 주렁주렁 열리며 병충해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 할머니가 병증에 시달리다 그만 세상을 뜨게 되는데, 그런데 이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잘 열리던 감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는 일절 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감이 하나도 열리지 않을 수 있을까? 혹시나 저 감나무가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감나무가 슬픔에 잠겨 감이 하나도 열리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마저 해봅니다. 이런 예상 속에 생명은 서로 나누어지고 떨어져 있지만, 일체 만물은 마음이라는 유기적인 시스템인즉슨 사랑으로 연결되어 교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말로 설명하기에는 다소 묘연한 부분이 있지만, 생체 에너지나 무량한 광입자의 움직임이 생명의 활동을 이루는 원류로서 이에 부합하는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실체로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이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감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말로 표현하기 전에 생각과 감정을 이미 알아차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세를 알아차린 가을바람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제 까닭 없이 분노와 원망의 감정에 젖지 마세요. 그러한 감정에 젖을수록 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분노와 원망에 휩싸인 기운뿐이랍니다. 아이와 할머니의 조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마음은 반드시 사랑의 마음으로 화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사랑의 마음을 놓지 마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당신이 가는 길에 사랑 에너지가 감싸고, 그 에너지에 동화된 가을의 좋은 기운들이 언제든 당신을 행운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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