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가화포리(加火浦里)의 우리말 지명은 더불개, 더우개 이다. 천황산 남녘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로 임진성 안쪽 손목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때 부르던 지명이다. 가화포는 더할 가(加) 불 화(火) 개 포(浦)자를 쓰니 불이 덮은 개를 의미한다. 더불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조선 태종 때라고 전하니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일부 자료에는 가대포리(加大浦里)로 기록된 곳도 있지만 가화포리의 잘못된 표기로 생각된다. 

후에 가화포는 인구의 증가에 따라 상·하가화포리로 나뉘고 상가화포리는 앞 두 글자를 떼어서 상가리(上加里)가 되고, 마을의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남구 북구로 나눠진다. 하가화포리는 바다와 접한 마을로 하덜개라 부르다 가화포의 원 지명인 덮을개, 더우개의 음을 따서 덕월리(德月里)가 되었지만 큰 덕(德) 달 월(月)자의 한자 의미와는 상관이 없는 지명이다.

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13년(1431) 경상도 감사가 아뢰기를, “남해도(南海島) 남편의 바깥쪽 가화포(加火浦) 고을포(古乙浦)에 사는 백성들이 경작하는 우현(牛峴) 안쪽 평산 영전(平山營田)의 한 곳의 전토를 평산 만호에게 수호하게 하여 내왕하면서 경작하게 하고, 그 우현(牛峴) 바깥쪽 대양(大洋) 가[邊]의 전토는 백성들이 개간하여 경작함을 금하소서.” 하므로, 의정부와 제조에서 같이 의논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마을의 역사를 알 수가 있다.

고려 때에는 왜구의 침범으로 남해섬 전체가 왜구의 손에 들어가 있어 일반 백성들이 살기 힘든 곳이었다. 기록을 보더라도 남해는 인물이 다 없어지고 토지만 남았다고 적고 있어 언제쯤 앞바다가 불로 뒤덮인 적이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고려 말에 있었던 왜구 소탕작전으로 전해지고 있는 정지장군의 관음포 전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사 정지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왜선 120여척이 경상도 앞바다에 출몰하자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漫殊)는 위급함을 알리며 지원을 요청했다. 이 때 가장 가까이에 있던 고려 수군은 정지가 이끄는 수군으로, 47척의 함선으로 전라도 나주, 목포 부근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정지는 경상도의 위급함을 듣고 밤낮으로 병사들을 독려하며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노를 저어 늦기 전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섬진(蟾津)에 도착한 정지는 서둘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면서 병력을 최대한 불리기 위해 애를 썼는데 적은 이미 남해 관음포(觀音浦)까지 와 지체할 수도 없었고 정찰을 통해 고려 수군의 숫자가 별거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왜구는 공세로 나왔다. 정지는 지리산 신사에 사람을 보내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으니 신령의 도움을 요청하도록 했다.

적은 기치를 세우고 칼과 창을 번쩍이며 사방에서 에워싸고 전진해 왔다. 위급 상황에서 정지는 전투에 앞서 하늘에 절을 했는데, 그러자 바람이 갑자기 고려군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고려 수군은 바람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이동해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렀다. 그러자 왜구는 큰 배 20여척에 배마다 군사 140명을 태워 앞으로 전진하도록 했다. 정지는 왜구와 격렬한 사투를 벌여 적선 17척을 화포를 이용해 수장시켜버렸다. 이 싸움에서 병마사(兵馬使) 윤송(尹松) 등도 화살을 맞고 전사했으며 고려군도 어려운 싸움을 벌였다. 왜구는 17척의 큰 배를 잃은 외에 2,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전의를 상실한 채 퇴각하였다.

이 해전은 관음포전투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박두양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그렇다면 박두양은 어디일까. 여수시의 자료에는 양(洋)은 견내량, 명량 등에서 보듯 섬과 섬, 또는 섬과 육지 사이의 해협을 가리키는 한자 양(梁)과 같은 말이다. 우리말에서는 목으로 번역되며, 박두양(朴頭洋)은 백서량으로도 불렸던 여수 신덕 앞바다로 비정되며 지도상에서 관음포와는 바로 코앞 거리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양(洋)은 큰 바다를 뜻하는 글자이며 지도에도 남해의 앞바다를 대양(大洋)으로 표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을 가로막은 큰 배 20여척이 어디에서 왔을까? 이는 관음포의 적선이 앞질러 왔다기보다는 평산포에 있던 적선이 나온 것을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그 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불이 바다를 덮어 가화포가 된 것으로 추정을 하지만 사료가 없으니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구미리는 거북 구(龜) 꼬리 미(尾)자를 쓰서 거북의 꼬리라는 뜻으로 풀이 된다. 마을의 형상이 거북의 꼬리를 닮아서 구미(龜尾)라고 했으나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아홉 구(九)자로 바꿔 구미(九尾)가 되었다고 한다. 꼬리가 아홉 개라면 생각나는 동물은 구미호가 있지만 좋은 이미지를 가진 동물은 아니라 마을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쉬운 글자로 바꾸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 다른 뜻으로는 해안선이 아홉 등 아홉 골이 있어 구미로 하였다고 하며 우리말 지명은 구우방이라고 한다. 해안에는 500년 전에 주민들이 태풍과 해일을 막기 위해 조성한 방풍림이 있다. 구미는 바다나 강가의 땅이 들어간 곳을 말하는 우리말로 구미지다 후미지다의 어원으로 바닷가나 강가에 많이 남아있는 지명이다. 남해에도 구미가 들어간 지명으로 선구미, 놋기미, 유구미, 갈구미, 양화기미 등이 있다. 

상가리에 있는 임진성(壬辰城)은 임진년(1592)에 축성했다하여 임진성이라 부른다. 이 성은 군, 관, 민이 힘을 합쳐 쌓았기에 민보산성(民堡山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왕산 구릉에 돌을 이용하여 둘레 286m의 작은 규모로 쌓은 산성으로 동쪽과 서쪽에 문을 내었으며 성 안에는 우물터가 있다. 성벽의 바깥 주변에 해자의 흔적이 있고 옛날에는 성루에는 망대, 서당도 있었다고 전해온다.

옛날에는 임진성과 평산진성 사이의 작은 포구(浦口)를 옥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거제도 옥포와 남해의 옥포가 지명이 동일하므로 왜군이 옥포로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해 축성을 하였지만 이곳에서 왜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남쪽 동문 터와 서문 터 사이의 173m는 보수 공사를 마치고 1974년 12월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0호 임진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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