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과 풍요의 계절 가을입니다. 보통 이때가 되면 누런 벼와 잘 익은 홍시가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빨갛게 익은 감 홍시가 즐비한 마을 그리고 황금색으로 물든 논 자락은 바라보기만 해도 따뜻한 정과 풍요를 느끼게 해줍니다. 얼마나 기다리던 결실이었던가요. 아니 얼마나 바라던 풍요인가요. 

지난, 여름 어느 해에 견주어도 유래가 없었던 이상 기후에 노심초사하며 정말 올해는 수확이 제대로 되려나 걱정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이처럼 가슴 뜨거운 풍요가 펼쳐지는 지금, 바라만 보아도 가슴을 뜨겁게 할 풍요가 일 년 내내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마저 지니게 합니다. 그만큼 풍요를 기원하는 농부의 마음이 간절하다고나 할까요. 여기에다 머지않아 펼쳐질 오색찬란한 단풍잎이 고운 빛깔로 산천초목을 장식하게 되면 풍요로 명명될 감성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할 것입니다. 

이런 기대감이 깊이를 더해갈 즈음 정작 우리가 만나야 속 깊은 풍요를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남아돌 풍요, 그 내밀한 정서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풍요를 담아낼 수 있다면 넉넉함이 남아돌 그런 가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풍요를 어떤 풍요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의 풍요라고 명명해 봅니다. 

마음에 담을 풍요, 아니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를 풍요, 어쩌면 그것은 우리 안에 내재한 저 무서운 감정의 사슬을 잘라내어야 비로소 만나볼 수 있는 마음의 풍요인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풍요, 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낯익은 감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떨쳐내야 할 습관을 수반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수행의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미 오랜 세월 거치면서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소라 할 화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의 사슬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풍요를 저해하는 감정의 사슬, 그중에서도 화가 풍요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면 이 간단치 않은 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마음의 풍요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풍요에 걸림이 되는 화의 성정에서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번쯤은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 온순하고 얌전한 사람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평상시에는 화를 잘 내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돌변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화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마음 곳곳에 남아있는 분노나 화의 감정에 몸과 마음이 거의 마비증세가 오듯 굳어지고 경직됩니다. 눈동자는 충혈돼 지고, 코는 실룩거려지고 입은 침이 마르고 귀가 먹먹해지며, 혀는 맛을 느끼지 못하고 냉기가 전신을 타고 돕니다. 또한, 다섯 장기는 분출한 분노의 기세로 인한 부작용으로 소화 기능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여기에다 화를 나게 한 당사자에게 왜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반감심리가 발동하기도 합니다. 

평소에 욕 한번 안 하고 살던 것과는 달리 상대방이 가장 상처받을 그런 무서운 악담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입이 험하고 거친 사람이 해당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얌전한 사람도 종종 이 같은 행보를 보일 때면 우리의 마음 안에 도사린 끝없는 분노의 사슬은 누구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생각이나 감정이 가지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생각과 감정이라는 개념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이야기가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이나 감정은 안으로는 내면을 다지는 역할을 하고 밖으로는 방사의 역할을 수반하고 있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방사되고 있습니다. 그 생각 중에서는 좋은 생각도 있을 것이고 분노와 노기에 찬 마음을 달래지 못해 터져 나오는 생각이나 감정도 있을 것입니다. 한번 방사된 생각은 그것이 좋듯 싫든,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사람이 한 번 노기에 찬 생각이나 에너지를 세상에 방사하면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 역시 노기(怒氣)에 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화를 내는 것은 나만의 문제를 넘어 모든 생명에게 영향을 미치게 한다는 점에서 이를 방치하는 것은 예사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요즘 기후 위기가 심각한 현상이 아열대 현상의 도래 이전에 우리의 마음이 분노에 휩싸인 결과는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화가 생기면 발산이 아니라 수렴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의 지병 가운데 화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속으로 분노를 끓이면서도 밖으로 표현해내지 못하고 삭히는 정서가 심각한 화병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는 화가 날 때는 통상적으로 삭이고 참는 것이 예의와 도덕에 일치하는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화가 날 때는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하더라도, 화가 날 때는 어느 정도 화를 발산해내는 것이 풍요를 잇게 하는 것이라면 적당히 화를 내는 것도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신체 활동의 영역에서 발산과 수렴이 갖는 길에서 화도 적당하게 내어주는 것이 정신건강에 유리한 측면이라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발산하고 수렴하는 심리적 안배에서 화를 분출하는 것과 고요를 담아내는 이 양자가 조화를 이룰 때 풍요에 이를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내는 것은 실로 만병의 근원입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인격의 실격자요, 그렇다고 화를 참는 것 또한 화병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가을에 담아내야 할 풍요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화를 다스리는 지혜, 내면에 억압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폭발시키지도 않은 화 다스리는 능력, 이것이 이 가을을 빛나게 할 풍요라면 이를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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