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대정리(大丁里)는 큰 정자나무와 정자가 있어 큰 정자마을로 불리다가 대정자리나 큰 정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밭에 있는 지석묘는 오래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지금도 동정, 남정, 금곡을 대표하는 중심마을이며 옛날에는 대정 사창(社倉)이 있던 마을이다. 한자 표기는 큰 대(大) 장정 정(丁)자를 쓰지만 옛날에는 큰 대(大) 정자 정(亭) 아들 자(子)를 쓰거나 큰 대(大) 정자 정(亭)자를 써서 큰 정자가 있었던 마을을 뜻했다. 지금은 뜻을 알 수가 없는 지명이 되었다.

정자리의 지명은 여러 곳에 있으며 대부분이 정자가 있었거나 지금도 있는 마을을 지칭한다. 따라서 경관이 좋은 곳에 고관이 귀향하여 정자를 지었다거나 유명한 정자이름이 남아 있어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지만 이곳에는 정자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왜 큰 정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자는 자연 경관을 감상하면서 한가로이 놀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주변 경관이 좋은 곳에 지은 집을 말하며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누(樓), 정(亭), 당(堂), 대(臺), 각(閣), 헌(軒) 등을 누정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누각에 비하여 정자는 작은 건물로서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 있다. 남부 지방에 많은 모정(茅亭)은 주로 농경지를 배경으로 한 정자로서, 편액이나 현판은 물론 자체의 고유한 명칭이 없이 주로 농군들의 휴식소로 간편하게 지은 집이라는 점이 누정과 다르다.

우리나라의 누정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반 서민들의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왕실과 군신 간의 유휴 처로 시작하여 후대에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누정은 경관이 좋은 곳에 세워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과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하거나 강학(講學)으로 인륜의 도를 가르치던 구실을 하였다. 누정에서는 씨족끼리의 종회(宗會)나 마을사람들의 동회(洞會) 또는 각종 계의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정자 중에는 활쏘기의 사장(射場)의 구실을 하던 곳도 많았지만 대정리의 정자는 군 주둔지와 가깝고 조선시대에 소나무 벌목을 감시하는 곳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남정리는 남해현지에는 남정자리로 기록되어있다. 한자로는 남녘 남(南) 정자 정(亭)자를 쓰는 남쪽 정자마을이었지만 뒤에 남녘 남(南) 장정 정(丁)자로 바꾸어 뜻을 알 수 없는 지명이 되었다. 남정자리는 남쪽에 또 다른 정자가 있었다기보다는 대정자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추정을 한다.

금곡마을은 쇠 금(金) 골 곡(谷)자를 쓰며 고유지명은 당연히 쇳골이다. 마을 뒷산의 형상이 쇠 금(金)자를 닮았다고 하나 확인하기 어렵고 산엽이라고도 부른다. 쇳골은 옥기산과 남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 마을인 샛골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동정리의 옛 지명은 둔전동리로 진둘 둔(屯) 밭 전(田) 마을 동(洞)자를 쓰며 둔전이 있던 마을이다. 우리말 지명은 둔전골, 딘정골이었지만 대정자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녘 동(東) 장정 정(丁)자를 쓰서 동정마을로 바꿨다고 한다. 자연 마을로는 바깥모, 안모, 장싱이가 있으며 마을의 들머리에는 동제를 지내고 밥을 묻는 밥무덤이 있다.

둔전은 농사와 전쟁을 같이 수행한다는 뜻으로 주둔지 부근의 땅을 개간해 군량을 현지 조달함으로써 운반의 수고를 덜고 국방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에는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도 둔전이라 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전자를 국둔전(國屯田), 후자를 관둔전(官屯田)이라 하여 서로 구별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둔토(屯土)라고도 했다. 

둔전은 고려 초기부터 설치되어 군인을 직접 사역시켜 경작하는 경우와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어 수확량의 4분의 1 정도를 수취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으며 둔전사라는 기구를 두어 관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의 둔전은 설치방법과 소유권에 따라 영,아문 소유지와 개인 소유지인 민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관제개혁으로 의정부 탁지아문에 이속된 둔토는 여러 부서로 이속되다 궁방전(宮房田)·역토(驛土)와 함께 국유화됨으로써 일제 통감부 수중으로 들어갔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뒤 둔토특별처분령에 의하여 둔토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반인에게 불하함으로써 둔토·둔전은 역사상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동정리의 지명에 장정 정(丁)자를 쓴 것은 둔전에서 일하던 정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정은 정남(丁男)이라고도 했으며, 정인(丁人),정구(丁口),정부(丁夫),인정(人丁)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15세 이상 59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16∼59세까지의 남자를 정으로 파악하였다. 성인 남자는 60세가 되어야 정에서 벗어나 노(老)가 되어 각종의 부담을 면제받았다. 국가는 정을 각종 조세의 부과와 부역 징발의 주된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정은 정호(丁戶)와 백정(白丁)으로 구분된다. 정호는 국가에 특정한 역(役)을 담당하던 사람으로서 역의 대가로 소정의 수조지(收租地)를 받아 세습하였다. 반면 백정은 이와 같은 특정한 역을 지지 않았던 사람으로 이들은 국가로부터 수조지를 받지 못하였다. 백정 대부분은 상속이나 개간에 의해 민전(民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전조(田租)를 납부해야 했으며, 군역 이외의 잡다한 부역을 부담하였다.

고실곡은 천황산과 하지산 사이에 있는 서면과 남면의 경계가 되는 높은 고개로 옛날에 임금과 궁녀가 춤추고 노래한 고개라고 해서 고슬치(鼓瑟峙)라고 한다. 하지만 전국에는 여러 곳에 고실이 있다. 고곡(古谷, 高谷, 鼓谷) 고실(高實, 鼓室)이란 한자 지명을 사용하지만 고실은 고곡의 우리말이다 대곡은 한실, 오곡은 오실과 같은 지명으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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