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그래도 동네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부부의 출산 소식에 마을 전체가 기뻐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이후 일 년이 지난 오늘 아침, 이장이 방송으로 아이가 첫돌을 맞이하여 저녁에 돌잔치를 하니 많이 참석해달라는 내용을 전합니다. 그 방송을 들으니, 마치 필자의 손자가 첫돌을 맞이한 것처럼 기뻤습니다. 

60~70년대에는 한 가구당 5~6명 자녀의 출산이 다반사였던 시절에 비하면 첫돌 이야기가 나오는 자체가 생소하지만, 농촌의 현실에 비추어 마을에 아이가 태어나 첫돌을 맞이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돌잔치, 회갑 잔치 때면 온 동네가 들썩일 정도로 큰 행사였음을 상기하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흔치 않은 농촌에서 돌잔치를 연다는 소식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첫돌은 아이가 탄생 이후 일 년의 고비를 무사히 넘긴 재생의 뜻이 담겨 있어 잔치를 열고 돌잡이라 하여 돈, 실, 연필, 청진기, 마이크 등을 놓고, 아이가 선택하여 잡는 물건에 따라 돈은 부유함을, 실은 무병장수를, 종이(공책, 연필)는 학자가 되기를 기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풍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앞으로는 외형적 성장 못지않게 내면의 정서를 풍요롭게 할 그런 돌잔치를 행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흐름이 너무 외형으로 흘러 내면을 바라볼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잔치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확연히 드러나는데 아이의 성정과는 관계없는 여흥 위주의 프로그램이 그렇습니다. 물론, 전혀 외면할 수도 없는 시대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태어나 일 년이 되는 날, 심(心)과 성(性)의 내적 정서를 확인하거나 탐구해 보는 자리라면 몰라도 이를 도외시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길 여흥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심(心)과 성(性)의 내면을 바라보며 성찰한다는 것은 자연성을 찾거나 회복하는 일입니다. 자연성을 찾는 것이 어른의 입장에서는 다소 힘이 들 수도 있겠지만, 자연성을 무한히 내포하고 있는 아이의 마음에서 찾아내어 익히고 배워나간다면 전혀 불가한 일도 아닙니다. 

아이를 보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자연성입니다. 아이가 있는 자리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은, 아이가 어리다는 이유도 있지만, 아이의 자연성과 천성에 동화된 측면이 더 큽니다. 사심 없음, 걸림 없는 진실, 거리낌 없는 성품의 자연성에 동화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키워내고 받아들이며 배우는 것입니다.

본래 자연성은 최초의 성품이 깃든 자리요, 생명의 실상이 있는 그대로 전해지는 실체적 진실이 깃든 곳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담긴, 가식이 없는, 어떠한 사심도 욕심도 배제된 자연성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대기의 순환과 생명의 성장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게 합니다. 그 자연성이 깃든 대표적인 식물인 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여기 자연성이 깃든 과일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나무를 키워 수확한 과일을 먹는 순간, 과일나무와 분리되었던 육신은 나무와 하나가 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경계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과일 속에는 어느덧 경계가 없어져 버린 나무가 들어있고, 그 나무를 성장하게 하는 주변의 수많은 동식물의 삶과 죽음이 함께 내포해 있습니다. 어쩌면 조상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가 들어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과일을 사람이 먹습니다. 이제 나무와 과일에 들어있던 자연성은 사람에게 옮겨져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과일나무를 생성하는 자연성은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서 존재 속에 있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쉼 없이 반복합니다. 이 자연성은 그 중심에서 무엇 하나 분리되지 않고 오로지 일체감 속에서 동식물에서 나무로 다시 사람으로, 또 흙과 미생물로 무한 반복하며 생성을 도모하면서 말입니다. 이 자연성이 사람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에게로 말입니다. 아이 속의 자연성은 여전히 하늘을 보듬고 걸림 없는 지각 활동과 사심 없으므로 뭇사람의 자연성을 담은 순환의 행보를 멈추지 않습니다. 

아이의 자연성에서, 어른의 자연성으로 다시 자연의 자연성으로, 그 자연성에서 또 아이의 자연성으로. 하지만, 우리는 자연성의 순환이 가져오는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돌날은 어쩌면 지구를 생성하게 하는 자연성을 다시 살피고 정립하며 모자라면 보충하고 부족하면 채워줄 그런 날로 자리매김해보면 어떨까요. 

왜냐하면, 아이의 자연성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현실을 감안한다면, 전체 가족, 친지와 함께하는 돌날이야말로 사심 없음, 걸림 없는 진실, 거리낌 없는 성품 속 자연성을 탐구하며 배울 절호의 기회이자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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