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서호리의 옛 지명은 와야동리였다. 후에 마을 앞을 흐르는 큰 개천이 서쪽으로 흘러 서상 앞바다에 이른다고 서호리로 바꾸었다고 하며 한자로는 서녘 서(西)와 호수 호(湖)자를 쓴다. 서쪽에 호수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호수는 땅이 움푹 파여 자연적으로 형성된 내륙 수면으로 못보다는 깊고 넓게 물이 고여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곳은 그런 곳이 없다.

물이 고여 있는 곳은 크기별로 구분하여 큰 것부터 호수(湖) 못(池) 못(潭) 못(淵)으로 구분을 하였다 백두산 천지 한라산 백록담 천제연 등이 그러한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인위적으로 둑을 쌓아 만든 저수지는 제(濟)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서호는 규모가 상당히 큰 못이 있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장소는 없고 홀포를 호포로 부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지명으로 추정을 하면서도 서호리의 앞에는 연죽과 봉성, 그리고 고실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이는 곳으로 비가 많이 올 때는 거대한 호수처럼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

와야동(瓦冶洞)은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던 마을로 기와 와(瓦) 불릴 야(冶)를 쓰며 애애동으로도 불리었다. 여지승람에는 마을 앞에 염전이 있다고 적고 있어 바닷물이 마을 가까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전국에는 여러 곳에 와야동(瓦也洞, 瓦冶洞, 瓦野洞, 왯골)이 있으며 모두가 기와를 굽던 가마가 있었던 마을 지명이다. 기와는 고어에서 디새로 처음 나타나며 디새는 딜(질그릇을 만드는 흙)과 새(볏과의 풀)가 합쳐진 딜새에서 유래하였으며 딜ᅀᅢ와 디애를 거쳐 구개음화에 의해 지애가 되고 한자음 와(瓦)에 상관지어 지금의 기와가 된 것으로 추정을 하지만 다른 설은 맨 위에 덮는 기와를 뜻하는 개와(蓋瓦)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유점리는 버들 유(柳) 가게 점(店)자를 쓴다. 충청북도 영동군에 있는 유점은 놋쇠 유(鍮) 가게 점(店)자를 쓰며 놋그릇을 만드는 곳이 있어 놋점이라 부른 데서 유래하였으며, 금, 은, 동, 철점(金, 銀, 銅, 鐵店)은 광물을 캐거나 제련하는 광산이 있던 곳을 이르는 지명이다. 따라서 유점리는 버들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는 마을을 이르는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버들로 만든 제품에는 고리짝이나 광주리를 비롯하여 물건을 담아두는 용기가 있었고 지금처럼 플라스틱 용기가 나오기 전에는 나무나 대오리를 이용하거나 버들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고리버들은 키버들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한반도 고유종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하천, 계곡 주변, 습한 땅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버드나무 종류가 어긋나는 잎을 가진 것에 비하여 키버들 종류는 마주나는 잎으로 다른 버드나무류와 구분할 수 있다. 작은키나무로 여러 줄기가 한 군데서 다발로 모여 나며 꽃은 암수딴그루에 잎이 나오기 전에 먼저 피는데, 다른 식물들보다 이른 봄에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식물로 동요에도 버들개지나 버들강아지로 나온다. 

서호리 마을 뒷산 대밭에는 큰 돌로 축대를 쌓은 재앙구터(일명 장군터)가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어떤 장군이 살면서 부채로 도술을 부려 배를 약탈하였기에 나라에서는 군대를 풀어 그를 잡게 하였고 장군은 지네로 변신해 숨었으나 조정에서 보낸 군사들이 그 지네를 밟아 죽여 버렸다고 한다. 건물터의 단은 길이에 비해 폭이 좁은 편이며 주변에는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데 대부분 암막새로 격자무늬, 어골무늬 기와이며, 드물게 발견되는 청자 조각들로 보아 고려시대의 건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건물터의 석축 아랫단은 자연석으로 쌓은 것이고 그 위의 단은 소형 활석으로 후대에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후대에 이 건물이 어떤 세력에 의해서 일부 개축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상황과 지리적 조건, 그리고 주위 배경으로 보아 이곳이 남해안을 장악한 삼별초 유존혁 부대의 근거지였음을 유추하게 하지만 남겨진 자료는 없다. 

연죽리는 마을 뒷산에 연화사(蓮花寺)라는 절이 있어 연화동(蓮花洞)이라 불리다가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 했다는 연죽사가 있던 곳이라 연죽리로 고쳐 불렀다고 하지만 기록에는 없다. 연죽리는 연기 연(煙) 대 죽(竹)자를 쓰며 우리말 지명은 연짓골이다. 한자의 뜻을 따르면 연기골이나 연절골, 연지골일 가능성이 많지만 한자지명은 의구심이 많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대밭 마을 하면 운치가 있는 시골 풍경이 떠오르겠지만 사찰의 이름을 연죽사로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비슷한 사찰 이름도 없다. 연죽은 담뱃대를 이르거나 담뱃대를 만드는 대나무를 지칭하는 말인데 절과 담배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하는 의문이다 연화사는 연꽃 연(蓮) 꽃 화(花)자를 쓰서 부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며 연짓골 역시 연꽃 연(蓮) 못 지(池)로 보면 연못이 있던 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연죽리는 원래는 안골 냇골 냇골안 안터골 등으로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이다. 철원군 갈말읍과 부여군 옥산면, 산청군 사천면에 내대리라는 마을이 있으며 전국에는 안골과 안터라는 지명이 많다. 내대리는 안 내(內) 터 대(垈)자를 쓰며 우리말 지명은 안터골이다. 안골 마을에 있었던 내대사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후에 사람들이 연기를 남해 사투리 내로, 대를 대나무로 쓴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연짓골은 연절골에서 온 말이며 대사리의 한지골과 같은 의미를 가지지만 연기보다는 연꽃과 관련이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연죽저수지에서 수치산 자락으로 올라가면 99년 4월에 문을 연 남해추모누리 공원이 있다. 서면 연죽리 산8번지 11만 평방미터에 자리 잡은 공원은 매장묘역, 평장묘역, 안락원 연죽공동묘지, 평현공동묘지, 화장장, 장례식장을 갖추고 있으며, 홍보관에는 우리나라의 장례관습과 외국의 장사문화를 소개하고 장례의 관습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전시해 놓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이 선진 장례문화를 도입한 곳으로 남해에 사는 군민뿐만 아니라 객지에 나가 사는 남해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특혜를 주고 있으며 주변의 경관이나 조경은 고인을 생각하며 산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넓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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