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서상리(西上里)는 서녘 서(西) 위 상(上)자를 쓰며 서면의 상등마을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지형으로 볼 때에도 높은 들이 있는 곳이며, 남해와 여수를 오가는 여객선의 축항과 면사무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 이 지역에는 호포해촌(湖浦海村), 유점리(柳店里), 서상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서상리만 남았다. 호포해촌은 마을에 호수 같은 호포(湖浦), 호을포(湖乙浦), 홀개로 불리던 포구가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갯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지명이다. 호포는 왕조실록에는 호을포(呼乙浦)로 남아있어 호수가 있었다기보다는 호을포(湖乙浦, 呼乙浦)에서 호포가 유래된 것으로 본다. 

호을은 홀로의 고어로 호을아비나 호을어미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홀이라는 말은 사용되고 있다. 홀로의 고어는 ᄒᆞ올로, 호올로, 호을로, 홀로, 호올노, 호을노, 홀노 등으로 외짝이라는 뜻이다. 또 한자어인 홀(笏)은 신라가 당제(唐制)의 관복을 입은 뒤로부터는 한말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는 자의 필수품이었다. 그 길이는 대개 1척이며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에 손에 쥐던 물건으로 일품부터 사품까지는 상아홀, 오품 이하는 목홀(木笏)을 썼다. 원래는 임금 앞에서 교명(敎命)이 있거나 아뢸 것이 있으면 그 위에 써서 비망(備忘)으로 삼았던 것인데 후세에는 의례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호을포는 관리들이 지니고 다닌 홀처럼 길게 늘어진 포구로 볼 수도 있지만 홀은 뜻하는 한자가 따로 있어 호을로 표기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옛 지리지에서 홀은 성(城)의 뜻을 가지거나 용비어천가에서는 홀이 골을 표기하는 글자로 사용하였기에 홀자의 의미를 홀포와 연관지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기록에는 호을포는 현남 15리에 있으며 염밭이 있다고 적고 있어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였음을 알 수가 있다. 옛날에는 호포보다는 홀포 호을포 홀개로 불리었으며 서호도 서쪽에 호수가 있는 마을이 아니라 서쪽에 홀포가 있는 마을이어야 옳다. 

장항(獐項) 마을의 우리말 지명은 노루목이라 불리었고 산세가 노루의 목과 비슷하다하여 지은 지명이라고 한다. 실제로 서상에서 넘어오는 고개와 남면 구미에서 넘어오는 두 곳에 장항치와 노루목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장항은 한자로 노루 장(獐) 목 항(項)자를 쓰기에 그대로 풀이하면 노루목이 맞지만 노루라는 단어는 동물이름 외에 고어에는 노리다 늘이다라는 뜻도 같이 있어 단순히 노루라고 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전국에는 노루목이라는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그곳의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노루가 지나다니는 길이거나 노루가 자주 나타나는 곳, 지형이 노루머리나 노루의 목처럼 생긴 곳, 지형이 넓은 곳에서 좁아지는 곳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남해에도 노루목이 여러 곳에 있지만 지형이나 특징이 다르다. 그리고 소나 여우 개목이 지명으로 쓰이지 않은 것은 노루라는 말이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목 항(項)은 손목, 발목, 건널목처럼 좁은 구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윗목, 아랫목, 골목처럼 한 지역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각 지역에 있는 노루목의 지명을 보면 전라도는 노루목, 놀목, 놀메기, 충청도는 누르매기, 눌목, 누르목, 경상도는 널목, 너르목, 너르메기, 경기도는 날목, 날매기, 날미 등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도 노루와는 연관이 없는 노리다, 넓다, 누렇다에서 온 것으로 본다.  

세종 14년(1432) 전 광양 현감 강희려가 상서하기를, 남해도(南海島)의 남쪽, 미조항(彌助項), 장항(獐項), 동모포(冬毛浦) 등과 같은 곳은 병선(兵船)을 정박(碇泊)시켜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방어의 시설을 하지 않아서 왜변(倭變)을 당하여 막을 때에는 염려되오니, 청컨대, 긴요하지 아니한 적량(赤梁)의 병선 9척을 폐지하여 미조항에 옮겨 정박시키고, 또 1척을 폐지하여 장항에 옮겨 정박시키며, 또 평산포(平山浦)에 정박시킨 병선 9척 가운데서 2척을 폐지하여 동모포에 이박(移泊)시킨다면 왜구가 퇴축(退縮)하게 될 것이오며, 섬 안의 개간하지 않은 진지(陳地)를 죄다 개간하면 농민이 두려워하여 들어가기를 겁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장항이 한때는 조선 수군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자작마을은 자작곡(自作谷) 자잣골, 재작골로 불리며 자작나무가 많은 곳이라고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짓는 곳을 이르기도 한다. 주변에는 둔전이 있어 나라가 관리하는 농지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일부는 스스로가 농지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본다. 또 까치가 알을 품은 형상의 명당을 자작(滋鵲)이라 하여 지명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한자가 다르다.

서상리에는 바다를 매립하여 조성한 남해스포츠파크가 있다. 총면적 30만㎡로 200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4년 완공되었으며 프로축구, 프로야구, 각종 학교 팀들의 전지훈련장으로 각광받는 등 스포츠메카로 자리 잡고 있다. 스포츠파크에는 사계절 잔디구장과 인조잔디구장, 야구장, 풋살경기장, 테니스장, 실내수영장, 향토역사관, 메디컬센터를 비롯한 각종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보도와 해안산책로, 스포츠파크교 등이 섬의 서쪽바다와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치를 자아낸다. 

또한 스포츠파크호텔과 조각공원은 스포츠파크를 찾는 사람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스포츠파크호텔은 가족호텔의 기능도 가지고 있으며, 해수사우나, 휘트니스클럽, 스카이라운지, 대규모 연회장 등 각종 편의시설이 대도시의 호텔 못지않게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최근 관광객들에게 볼거리 제공과 가족단위 관광객을 위하여 어린이 놀이동산과 더불어 남해대교를 옮겨놓은 듯한 현수교를 설치하여 찾는 이의 눈길을 끌고 있지만 옛날 그 자리에는 모래밭과 송림이 있어 시원한 바닷바람과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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