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부인(蓮臺婦人)-남해읍 평현리 열녀각의 사연
-김우영 본지 논설위원장-

  
 
  
글쓴이 김우영 (향토사학자, 남해신문 논설위원장) 
  




잎사귀마다 ‘매울 열(烈)’자를 새겨 파먹는 이름 모를 벌레가



영조임금 ‘연대’라는 시호 내리고 정려지어 기리게 해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기기 못합니다. 비록 몸은
천인일지라도 마음까지 천인일수는 없습니다”









*이원하·김자평·임분선

남해 평현 성주 이씨 집성마을의 유학(幼學) 이원하(李元廈)는 고을에서도 이름난 선비였다. 유학은 조선조 중영 이후 재능과 덕행이 뛰어난 40세 이상의 선비를 매년 정월 고을 주민들의 추천을 받아 관찰사가 조정에 추천하였던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을 말하는데 이원하는 이 고을에서도 이름난 호족으로 많은 사노(私奴)들을 거느리고 살았다.

이들 사노 가운데 김자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열 일곱 살 된 꽃다운 나이의 딸이 있었다. 노비들에게는 떳떳한 이름이 없었던 그 시절의 관행대로 이 딸에게도 달리 이름이 없었던지 기록으로는 전해오지 않는다.

또 총중에 임분선이라는 스물 네 살의 다른 사노가 있었는데 비록 신분은 천인이었으나 마음씨가 착하고 근면·성실·건강하였다. 그러나 그의 처지로는 혼례를 치를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학 이원하는 혼기에 접어들었으나 어쩌지 못하는 이들의 처지를 가련하게 여겨 두 사람의 혼례를 주선하는 것은 물론 마을 어귀에 아늑한 오두막을 지어 그들의 신접살림을 차려 주었다. 그러나 호사에는 다마라고 했던가! 그들의 새 출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남편인 임분선이 돌연 급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김자평의 딸은 3년 동안 수상(守喪)하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그 아비 자평은 천인인 딸의 처지가 너무나 딱한 위에 청상과부까지 되었음을 안타깝게 여겨 개가를 주선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부모의 마음인들 그러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딸은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기기 못합니다. 비록 몸은 천인일지라도 마음까지 천인일수는 없습니다”하고 아버지에게는 고하고는 통곡한 뒤 빨래한 옷에 곱게 머리 빗고는 몸을 숨기고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평은 동민들을 동원, 마을 인근을 두루 찾으니 딸은 산골짜기 숲 속에 목매 죽어 있었다. 흘린 피와 눈물이 나뭇잎에 점점이 떨어져 말라붙어 있어 보고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서기 1725년(영조 원년)의 일이었다.

이듬해 봄이 와서 나뭇잎이 새로 피어나니 잎사귀마다 ‘매울 열(烈)’자를 새겨 파먹는 이름 모를 벌레가 수도 없이 번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글자 새겨진 나뭇잎은 바람을 타고 마을마다 고을마다 날려 가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해마다 일어나 3년 간이나 계속되자 소문은 소문에 꼬리를 물고 온 나라에 퍼져 나가자 듣는 사람 모두가 감탄을 하고 만다.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런 희한한 일이 일어나자 유학 이원하는 당시 고을 판관(判官-지방장관의 속관으로 민정의 보좌역을 담당했던 6품의 벼슬아치) 받동원과 고을 섭니 50여명의 뜻을 모아 1728년 무신년(영조 4년) 12월에 조정에 상소하기에 이른다.(당시 현령은 윤 하)

이렇게 하자 이듬해 봄부터는 그 이상한 벌레도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상소문을 접한 영조는 크게 감동하여 1737년(영조 13년) 6월에 칙명(勅命)으로 전국 여인들에게 귀감이 되라는 뜻으로 ‘연대(蓮臺)’라는 시호와 정려(旌閭)를 함께 내렸다고 한다. (유의양의 ‘남해문견록’에는 영조 5년(1729)으로 기록되어 있음)

당시의 현령은 지우익(池友翼)이었다. 연대는 ‘연화대(蓮花臺)’의 준말로 불가에서 극락세계에 있다는 ‘연꽃으로 높이 쌓아올린 돈대’를 일컫는 말로 「심청전」에서도 용왕이 심청을 연꽃가마에 태워 환생케 했다는 이야기와 통하는 말로 여인에게 내리는 최상의 칭호라고 한다.

  
 
  
남해읍 평현리 길가에 세워져 있는 연대부인 열녀각. 영조임금이 시호를 내리고 정려를 지어 기리게 했다고 한다.  
  



























훗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한파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 모든 서원이 폐문 되고 헐려졌을 때도 영남에서 밀양의 아랑각과 남해 평현리의 ‘연대부인 열녀각’만큼은 그 화를 면했다고 전한다. 왕명으로 건립했다는 것이 구실이었다는 것이다.

*남해현읍지의 기록

네 번에 걸쳐 발간된 우리 고을 현읍지(縣邑誌)의 열녀조(烈女條)에서도 그의 정절을 소개하고 있다. 1785년∼1786년 연간에 간행된 「진주진관 남해현지」와 1832년∼1833년의 순조 연간에 나온 「경상도 읍지-남해현 읍지」, 그리고 1899년에 나온 「남해군 읍지」와 「남해읍지」등 네 종의 읍지에 실린 내용은 대강 비슷하다. 여기에 옮겨 본다.

‘열녀 연대(蓮臺) 사노 임분선의 처로서 나이 겨우 17세에 그 부군이 사망하니 3년 수상하며 애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 부친 김자평이 천인에다 가련한 청상과부를 개가코저 하니 연대가 이 말을 듣고 울음을 그치고 빨래한 옷에 머리 빗고 잠신하여 일모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그 부모가 반드시 죽었을 것이라 하여 이웃 사람들과 더불어 두루 찾아 산골짜기에 이른 즉 목매 죽어 나무수풀에 방울방울 피·눈물이 잎마다 말라붙었음은 정절이요, 바탕이 천함은 타의에 의해 얽매인 고로 무신년(戊申年)에 상소하여 상인의 신문을 면하고 현내면 평현리에 정문(旌門)을 세우다’라고 쓰고 있다.(원문은 생략)

*남해문견록의 기록

한편, 조선조 숙종 때의 문신, 학자였던 후송(後松) 유의양(柳義養)이 영조 47년(1771) 삭탈관직 당하고 서인(庶人)이 되어 남해로 유배와서 약 1년 동안 남해에서 보고 들은 풍물을 기행문체로 쓴 한글 기행문 「남해문견록」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후송이 남해에서 적객(謫客)으로 머문 때가 기록으로 1771년인데 연대부인의 순절(殉節)은 불과 46년 전의 일이 된다. 더구나 연대라는 왕의 시호가 내려지고 정려가 세워진 것이 1737년이었으니 후송이 이 곳에 와있던 34년 전의 일이 되는 셈이다. 후송의 남해문견록에서 연대부인 기록을 살펴본다.

‘읍촌 여인들의 음풍(淫風)이 성하여 정절지키는 이가 적은데 열녀 일인이 있으니 이름이 연대라 상사람 김자평의 딸이요, 사노 임분선의 처가 되었더니 연대 나이 겨우 십칠세에 홀로 되어 삼년상의 슬픔을 마치니 그 아비 젊은 과부의 신세를 불쌍히 여겨 개가 시키려 하니 연대 산골 나무에 목매어 죽으니 남해 현감이 계를 올려 왕께 여쭈어 지금 임금의 기유년(영조 5년, 1729년)에 정문을 마을에 세우도록 하는 은전을 내리시니 성재포상의 은혜가 이런 바닷가 마을까지 미쳤으니 뉘 아니 감동하리오.(다른 기록에는 영조 13년-1737년 6월 연대라는 시호와 정려가 내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관장(官長-고을 원을 높여 부르는 이름)된 이가 효열지행을 각별히 숭상하면 풍속이 거의 나을 듯 싶고 효열지행을 가르친 후에야 나라에 충성하고 윗사람을 섬길 줄 알리로다’하였다.(지금 맞춤법으로 풀어 씀)

*열녀각 현판의 내용

마지막으로 연대부인 열녀각 안에 걸린 현판(懸板의 내용을 풀어 본다.

‘슬프다. 옛 연대는 가히 열녀라 말할 수 있다. 해중 벽처에서 출생하고 시집가서는 남편과 따뜻한 방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문득 남편을 사별하니 그 아비가 딸의 청상(靑孀)됨을 가긍(可矜)하게 여겨 장차 개가 시키고자 하니 연대, 이 말을 듣고 부주전(父主前)에 아뢰기를 -열녀는 불경이부(不更二夫-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음)라 하였거늘 내 비록 천한 처지이나 어찌 지조(志操)까지 천하리오- 하고 슬피 울며 옷을 빨아 입고 머리에 빗질하고 은연히 하늘에 고한 후 가만히 집을 나와 잠적하고 날이 저물어도 돌아보지 않거늘 그의 부모가 왈칵 의심이 나서 이웃 분들과 함께 산굼턱과 물웅덩이 속을 두로 찾았더니 스스로 나무에 목매어 자결하였는데 점점 혈루가 나무 잎새마다 물들어 있었다.

다음해 봄 피눈물이 벌레로 화하여 잎새마다 글자를 새기는데 글자는 모두 ‘열자(烈字)’이더라. 이 광경을 보고 듣는 사람치고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유학 이원하와 무인 박동원이 그 뜻을 가련하게 여기고 그 절조를 가상히 생각하여 본읍 동지 50여인과 더불어 사문(辭文)을 지어 무신년 12월에 본군 사도에 품신하니 이 사실이 점차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향기로운 그 마음씨가 더욱 가상하다 하시고 즉각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하면 하시니 이 출천지정렬(出天之貞烈-하늘이 낸 정절)이 아니면 어찌 능히 주상의 어의를 감동케 하였으랴. 대개 이와 같은 열녀는 비단 하나 둘이 아니다.

청릉(靑陵)의 액사(縊死)와 금녀(今女)의 단발(斷髮)이 모두 예법을 숭상하는 가문에서 나왔거니와 연대는 머슴살이하던 분선의 처요 부모는 모두 무격(巫覡-무당과 박수)이나 집에 전하는 풍습을 익히지 않고 홀로 눈 속의 매화 같은 절개를 지켜 달리 할 생각이 없어 날로 심중이 돈독해지니 만일 절행과 아름다운 절조가 타고난 천성이 아니면 어찌 능히 백옥같이 이러하겠는가? 양풍(良風-아름다운 풍속)을 상권(相勸-서로 권장)하여 세상에 격려하는데 가히 포장이 되리니 옛날에도 또 듣기 어려웠던 일이다. 한 포기 연꽃이 처염상정(處染常淨-더러운 곳에 자라지만 항상 깨끗함)과 같고 백척고송(百尺孤松-백발이나 키 큰 소나무)이 설산중(雪山中-눈 속에)에 독야청청(독야청청-홀로 우뚝 솟아 푸르른 모양)함과 같도다. 연대의 절행은 붓으로 묘사하기 어려우니 그 세교(世敎-세상을 가르침)에 어찌 도움이 적다 하리요. 이를 위해 몇 자 적은 것이다.
건륭 2년 정사(1737년) 6월  일
도광 19년 기해(1893년) 5월 일
중수(重修). 마을 유사 유학 김윤후
새긴 사람. 감석우, 김용찬, 이상천’


  
 
  
연대부인 열녀각 내부에 걸린 현판들에는 연대부인에  대한      
각종 기록이 새겨져 있다.
 
  


*연대부인을 생각하며

이 열녀비각은 읍에서 서상방향, 평현마을 입구 막 못 미쳐 왼편 길가에 있다. 정절이나 정조에 대한 가치관이 하루가 모르게 달라지고 있는 때에 지금부터 260여 년 전 그 때의 규범이 지금에도 그대로 통할 리는 없는 일이다.

성이 종족보존의 유일한 수단으로서 국가나 사회적 도덕률로부터 보호를 받고 신성시되던 당시의 시각으로는 정조나 정절이라는 것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최고선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탓에 어느 지역의 현지(縣誌)나 역사서에는 고을의 이름 난 효자 열부가 역사서의 면면을 장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충효나 정절이 말하자면 사회나 국가를 지탱하는 큰 버팀목이자 근본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한 자녀 갖기를 너도나도 선호하게 되고 피임약이 감기약 보다 더 흔하게 보급되어 성이 쾌락의 수단으로 더 치부되는 세상 인심 때문에 요즘 세대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왕이 감탄하여 정절부인들에게 최상의 영예인 시호를 내리고 정려를 하사하던 그 시대의 가치를 지금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일은 무리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열녀각 앞을 무심히 지나는 많은 길손들의 외면을 서운해하는 일은 나이 많은 세대들의 부질없는 허욕이 아니라 정절이 바로 얼마 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가 공동으로 추구하던 지고지선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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