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작장리는 신라 때에 목마른 용이 이곳에 와서 물을 마시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에 따라 갈용고지(渴龍顧地)라고 불리던 마을이라고 한다. 그리고 명당자리 중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은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상으로 고관대작이나 큰 부자로 살 수 있는 명당이라고 하니 욕심을 낼 만한 땅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갈용고지는 어떻게 작장리가 되었을까. 작장리(勺長里)는 200년 전 기록에는 작장대리(酌長坮里, 勺長大里)로 되어 있어 지금의 작장리와는 소리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

작장리의 우리말 지명은 가랑고지, 가룡고지로 불리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갈용고지와 소리가 통하는 말이다. 먼저 가랑이란 말을  보면 바짓가랑이나 가랑이처럼 갈래를 나타내기도 하고 가랑비처럼 가늘다(細)는 의미와 가랑잎이나 갈잎처럼 마르다(渴)는 의미를 갖는 우리말이다. 따라서 갈용고지는 마르다는 의미를 따온 것이며 작장리는 가늘다는 의미를 따온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고지는 곶(串, 갑(岬)으로 지명에 붙어 반도 모양으로 나온 곳을 이르는 말에 이가 붙은 것으로 고지(高地)나 고지(顧地)와 같이 높은 땅이거나 돌아보는 땅을 이르는 말은 아니다.

작장리는 구기 작(勺) 길 장(長)자를 쓰거나 작장대리로 잔 작(酌) 길 장(長) 대 대(坮)자를 쓴다. 잔은 잔디, 잔걸음, 잔주름, 잔도, 잔가지, 잔돌처럼 명사 앞에 붙어서 작고 가늘다는 것을 나타내므로 이를 차용하여 잔 길이나 가늘은 길이 있는 곳으로 볼 수 있다. 

작장리는 작장에서 예계까지 죽전등, 물야산, 가물랑산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에 자리한 곳으로 경사가 심하여 농경지가 적고 길도 산중턱을 지나는 좁은 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을 한다. 해안선도 개펄이 없는 곳이 많다. 부산시 금정구에 있는 작장마을은 지세가 까치의 발바닥 형세라서 까치 작(鵲) 바닥 장(掌)을 쓰니 서면의 작장 마을과는 다른 뜻을 가진다.

예계마을은 상남과 서상의 중간에 있는 마을로 예도 예(禮) 경계할 계(戒)자를 쓰지만 옛날에는 예계암회리(禮戒巖回里)였다. 우리말지명은 예계방, 예기방, 여기방, 여그방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먼저 살던 곳에서 텃밭의 곡식을 도둑을 맞는 일이 자주 일어나 이 지역으로 옮겨오면서 예를 지키고 경계를 하라는 의미로 이름 지었다고 하지만 도둑에 대한 경계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을 이름에 예를 지키라고 한 것은 이해가 안 된다.

200년 전 기록에는 없는 작은 마을로 한자를 빌려 마을이름을 지을 때 몽싱이 나루부터 너라끝 까지 소두방여, 앞영, 구불영, 삼형제비렁, 진섬, 토여 등 크고 작은 여가 많아 여개나 애개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남해와 가까운 사랑도 에도 여개가 있다. 고유지명인 여기나 예계에 붙어 있는 방은 바위를 뜻하는 고유어로 방우로 불리기도 한다. 근래에 와서 알려지지 않은 벚꽃 길이 각광을 받고 있는 마을이다. 

참고로 바위(岩)에 대해 살펴보면 조선 초기의 용비어천가에는 바회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점차 바외, 바위로 변하였다. 바위는 지역에 따라 바우와 바구로 바뀌는데 바우는 바오 방우로 바구는 방구로 변하기도 한다. 남해의 경우는 바우나 방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설천면 노량리에 있는 감암마을은 감방우 라고 한다. 여는 물속에 잠겨있는 수중 바위를 이르는 말로 밀물 때는 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들어나는 경우가 많다. 암초(暗礁)나 은암(隱巖) 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암회리(岩回里)는 경기도 양주에도 있는 지명으로 바위를 돌아간다는 의미이지만 뜻대로 읽으면 바윗돌 마을이다. 감암회리는 큰 바윗돌 마을, 예계암회리는 여개 바윗돌 마을이 된다. 경북 칠곡군에 있는 예계마을은 조선 후기 한양 과거 길에 나선 선비들이 이곳에 유숙하면서 계곡에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면 과거에 합격한다고 한 뒤로 예계(禮溪)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시내 계(溪)자를 쓴다.

상남마을은 위 상(上) 남녘 남(南)자를 쓰며 근년에 지은 이름으로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전국에는 여러곳에 상남리가 있으며 대부분이 중심지역의 위나 남쪽에 있는 마을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작장에서 올라가는 임도와 중리에서 올라가는 남서대로를 따라 임도로 올라가면 망운산 정상 아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 공군 전공기념비가 있다. 2차 대전 당시 일제가 항복 선언을 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7일 밤 남해 망운산에 미 육군 항공대 소속 B24 폭격기 레이디럭 2호가 추락했다. 공급을 왔다가 일본군이 쏜 고사포에 맞은 것이다. 폭격기에 탑승했던 에드워드 밀스 대위 등 미군 11명이 모두 사망했다. 

일본군은 현장을 찾아 비행기와 미군 물건만 챙겨가고 시신은 그대로 두었다. 남해에서 공무원을 하던 김덕형(당시 31세) 옹이 나서 미군 시신을 수습했다. 이 일로 김 옹은 일본군 헌병대에 잡혀가 적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았다. 해방 후 김 옹은 망운산 추락 현장에 미군 전공비를 세우려 노력하여 1956년 5월 11일 개인재산을 털어 미 공군 전공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미합중국 11명의 공군 장병들이 1945년 8월 7일에 자우와 정의를 위해 싸우다 이곳에서 산화하였다. 쿠루만 미국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지도력 아래서 그들은 태평양 전쟁 시 일본침략자들과 싸웠다. 우리는 아래와 같이 용감한 용사들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표시로서 이전공비를 엄숙히 바칩니다. 하단에는 기장 에드워드 밀스 대위 외 11명의 명단과 비를 세운 관계자의 명단이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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