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호 남해스마트관광택시
정길호
남해스마트관광택시

황해도 구월산은 북한에서는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과 더불어 5대 명산의 하나로 꼽힌다. 구월산은 예로부터 음력 9월 경치가 제일 좋다고 해서 ‘구월산’으로 불린다. 해발 945m 흑운모 화강암으로 심한 풍화작용에 의해 도처에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풍광이 아름다워 명승지를 이룬다.

수려한 산세에 봉우리만 909개에 이른다. 북한에도 유명한 절이 많다. 정곡사에서 2km 올라가면 용연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이 폭포의 물은 구월산 상봉에서 흘러내려 수원이 길고 멀어 어떠한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절 오른쪽에는 삼형제 폭포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잠시 김삿갓 방랑자 시 한 수 소개한다.

“작년 구월에 구월산을 넘었는데/ 금년 구월에도 구월산을 넘는구나/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을 넘으니/ 구월산 경치는 언제나 구월이구나”

북한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는 제원폭포, 마치 명주실 뭉치가 마구 쏟아져 내리는 듯 폭포수가 아름답다. 이렇듯 풍광 좋은 명산에도 숱한 역사의 아픔이 배어 있다. 일제 치하에서는 항일무장 독립운동을 펼치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최후를 마쳤고, 6.25 때는 수천 명의 반공 유격대가 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 피를 흘린 곳이기도 하다. 

휴전 협정 후 처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구월산 유격대는 1950년 김종벽 대위가 창설한 연풍부대를 모태로 출발했던 부대이다. 그 후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부대원을 잃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만든 부대로, 처음엔 600여 명 정도였으나 이듬해 초 2500명으로 늘었고, 휴전 직후 해체 때까지 800여 명 규모를 유지했다. 

이들이 올린 전과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컸다. 휴전선 이북의 30여 개 섬을 장악해 인민군과 중공군 몇 개 사단을 묶어두고 30여 만 명의 동포를 탈출시킨 공은 더욱 크다. 거기엔 수십 명의 군번없는 여성대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빨래를 너는 방법으로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거나, 대원들의 생필품을 조달하면서 전투를 도왔다. 그중에서 가장 돋보인 여성은 이정숙 여성대장이었다. 이정숙 여성대장과 김종벽 대위의 활약은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만화가의 ‘구월산 유격대’에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초등학교 재학시절 형님이 빌려온 ‘구월산 유격대’ 만화를 실감 나게 본 적이 있다. 

구월산이 유격대의 거점이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북한이 공산화되자 200여 만 명이 남으로 피란했으나,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무장 항쟁에 나선 게 첫 번째이고, 기독교인들의 항거가 매우 거셌다.

인민국 징집을 거부하고 구월산에 모인 카톨릭 신자들은 전쟁 전날 밤 주임신부가 납치되자 거기에 격분해 유격대에 합류했다. 구월산 인근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 김구 선생(해주), 이승만 대통령(평산) 등 애국지사들의 영향까지 겹쳐 이들의 정신무장은 강했다. 

6.25 전쟁 중 한국군을 돕던 미극동사령부 켈로(KLO 한국연락사무소)의 한국부대원이 황해도 앞바다 석도에 갔다 초라한 행색을 한 구월산 유격대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초라한 비정규군이었다. 1.4 후퇴 때 남하하지 못한 군번 없는 용사들이었다. 이들은 구월산 주변을 돌며 유격전을 벌였다. 산세가 험한 깊은 골짜기 수백 개의 봉우리를 품어 과거 조전시대 때 임꺽정, 장길산이 반란을 일으켰던 곳이기도 하다. 그 후 유격대는 몽둥이와 낫으로 후방에서 함성을 지르게 해 큰 병력인 것처럼 꾸며 새벽에 기습 북한군을 무찔렀다. 

구월산 유격대 이야기는 1989년 정부가 문서창고에서 기록문을 찾아 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책 4권에 3329명의 명단과 조직편제 공식마크가 실려 있었다. 여기서 김정숙 구월산 유격대 여장군을 잠시 소개한다. 

일제가 망하고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에 의해 악질지주로 몰려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부모와 남편과 아이들은 공산당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녀는 3년간 강제 노역했다. 석방 후 그녀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방공청년들을 모아 유격대를 조직했다. 1950년 12월 20일 200명의 대원으로 북한 정규군 200명에 맞서 싸워 큰 전가를 올렸다. 1951년 1월 18일 유엔군 전황이 불리해지고 유격대 재령부대와 300여 명이 적군에 포위됐다. 그녀는 홀로 야밤에 거센 눈보라를 헤치고 100리 길을 걸어서 적 포위망을 뚫고 재령부대와 접촉해 “오늘 밤 중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 살고 싶으면 나를 따라와라”, 부대원 89명이 따라나섰고 나머지는 합류하지 않아 북한군에 전멸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 그녀는 당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표창을 받았다. 구월산 유격대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2013년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메릴 뉴멘 덕분이다. 한국전쟁 당시 구월산 유격대 고문관을 했던 사람으로 그의 사과문을 통해 구월산 유격대가 알려지게 됐다. 구월산 유격대는 미군의 도움으로 황해도는 물론 서해 섬들까지 점령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그들은 이름도 군번도 없이 철저하게 적 후방을 교란하며 종전까지 공산군을 괴롭혔다. 

승승장구하던 구월산 유격대도 비극이 찾아왔다. 미군 측에서 김종벽 대위와 이정숙 대장을 구월산 유격대에서 추방시켜 버린 것이다. 당시 백령도 기지 사령부 버크 대장(소령)이 김종벽 대위가 유격대를 지휘하면 국군과 유격대가 연계되어 통할권이 문제가 생기고 이정숙 대장이 미군에게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결국 구월산 유격대는 반란군이란 명목으로 무장해제 당한다. 

그런 후 유격대원 173명을 석도 앞 바다에 수장시키고 나머지 병력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낸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 후 구월산 유격대원들은 국군 8250부대에 편입되어 각 사단으로 분산 배치된다. 전쟁 중 다친 상이군인들은 부패되는 정부에 사회 무능력자로 찍히고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부하들을 보며 자괴감에 빠졌다. 이런 세상을 보려고 목숨 걸고 싸운 게 아니라며 국가를 상대로 명예회복운동에 나섰지만 무명용자라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지칠대로 지친 그녀는 정신질환 마약소지죄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면서 백령도 기지 사령관 버크 소령을 저주했다. 

유격대를 이끌고 구월산을 주르잡던 여장군은 1959년 10월 14일 37세 꽃다운 나이에 쓸쓸히 최후를 맞이했다. 그녀는 “군번도 이름도 없이 조국을 위해 싸운 용감한 무명용사 영웅들, 그대들의 씩씩한 목소리를 이승에서 들을 수 없게 되었구나, 자유대한이여! 그날의 우리들을 잊지 말아다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 곳으로 떠나갔다. 

세월이 흘러 그녀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대한민국 전쟁영웅 충무무공훈장 수훈자가 되었다. 그는 현충원에 안장되어 이 나라의 통일을 기원하고 있다. 이번 구월산 유격대 글을 쓰면서 민족의 명산에 오를 수는 없지만 켄버스에 아름다운 구월산 한 폭의 유화그림을 그린다. 70년 전 피를 흘리며 싸운 무명용사들을 생각하면서 피어린 구월산을 한번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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