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가 내립니다. 그리고 습한 날씨가 이어집니다. 금세 해가 반짝 나왔다가 얼마 안 가 먹구름이 일고 폭우가 쏟아집니다. 이로 인한 불쾌지수는 심리적 인정은 물론이고 더위마저 가세한 날씨에 더해 극도의 피로감만 더해갑니다. 이것도 재해라고 한다면 심신을 저하하는 재해임이 분명합니다. 정신적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이에 수반하는 생각, 감정, 느낌 등도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이러할진대 자라나는 농작물이나 식물 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들도 의식이 있는 생명으로 적정하고 쾌적한 기후나 날씨에 따라 삶을 도모하기에 그 민감성에 짜증도 나고 스트레스로 심리적 장애도 일어날 것입니다. 

풍우상설(風雨霜雪)의 변화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촉감과 느낌으로 감지할 입장에서 요즈음과 같은 예고 없는 변화는 그들에게도 생사를 가름할 정도의 민감한 상황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날씨로 인해 심리가 안정적이지 못하다 보니, 각종 병충해가 달라붙어도 이를 제어할 면역력 역시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요즈음의 기후나 날씨 정말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의 기상 이변이나 기후 변화 등이 일어날까요? 최근 몇 년 사이에 기후가 급격히 높아지는 것을 실감하며, 예전에 날씨가 이처럼 변동이 심한 때가 있었나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가정입니다만 날씨가 무더운 것은 기후의 영향이 크지만, 이러한 원인도 따지고 들어가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일의 분초가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분노와 두려움에 기인한 마음의 병입니다. 그 마음에 의한 병증이 자연에 옮겨져 이러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우려성 가정을 전혀 무시해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가이아의 학설은 지구는 대기권은 생물 즉 지구를 둘러싼 생명의 외피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다면 생명이 살기에 불완전할 것이라고 말하고 공생과 협동의 상호 작용에 의해 우리가 살기에 적당한 지구 환경이 만들어진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상호 작용의 원대한 기류는 눈에 보이는 현상 이외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갖가지 기운 작용에 의해 상태가 정해질 수도 있다는 논리를 허투루 들어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늘과 땅을 보며 사람이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드러내는 감정의 이입이 어떤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지 요즈음의 날씨를 보니 더욱 실감이 날 정도이니 말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자연도 상하고 마음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으면 자연도 극심한 통증에 시달립니다. 이런 감정이 심신을 오르내리니 자연이나 사람이나 몸에 열기가 상승하게 되어 자연은 자연대로 생체적 리듬이 깨어지고 이상 기후로 인해 더뎌지는 햇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 과다한 경쟁에 몰두하게 되니 순연한 정기를 생산할 능력마저 사라지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이런 열기를 식히려 쐬는 바람도 점점 강도가 세어지는 에어컨을 선택하게 되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가스가 기후와 기상 이변 그리고 대기 번복의 원인이 된다면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혜택에 힘입어 탄생과 성장의 궤를 같이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 자연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자연의 순연한 생기를 외면하면 사람이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천연의 공기와 산소, 바람과 물의 정기와 사계절이 뚜렷한 자연의 리듬과 절기가 없으면 어떻게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이들이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는 그야말로 아버지와 어머니로 상징되는 부모와 다름이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에게서 부모는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시는 분이기에 늘 감사와 고마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자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생명을 온전히 보존해주는 그 은덕에 무한히 감사를 느끼는 공경의 대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감성이 오랫동안 인간의 품성을 이끄는 중심이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자연의 기운이 역동하여 이렇듯 무질서한 날씨와 기후의 변동을 수반하니 이는 필시 자연 그 내면에 엄청난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역동적인 현상에서 우리가 담아내야 할 해법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필자가 동네 어르신과 대화하다 보면 “우리 후세대들이 참으로 걱정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우리의 후세대들이 이런 악조건의 기후 환경 속에서 자랄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된다는 염려의 말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다시 한번 마음의 용도나 사용의 정도가 어떠한지 개인도 개인 나름의 자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먹는 생각 하나가 갖는 영향력이 지구 전체의 운명마저 갸름할 정도로 엄청나다는 현상을 이상 기후를 통해 직접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 내 마음, 내 감정 내가 그냥 먹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을 어떤 기준을 두어 지구 운명설 운운하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상이나 기후의 위기가 우주 천체의 급격한 변화에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우리 일상 삶의 한가운데에서 작용하는 일단의 마음 길(욕망, 분노, 두려움)에서 빚어진 현상이라면 이를 마냥 두고 바라볼 상황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감정 따라 일어나는 기운(생각, 느낌, 말, 행동)이 주변의 산야와 동식물에도 영향을 미치게 하고 물과 공기와 산소와 바람의 세기와 대기의 순환에도 영향을 미치게 한다면 말입니다. 즉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그 순간에는 남이 모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소한 감정이나 생각 하나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또 그것이 돌고 돌아 모두의 삶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게 한다면 전혀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를 방관하는 것 자체는 자연의 부모에게 불효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면 개인 자격설 그게 전혀 무용한 이치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개인 자격 설은 어떤 심사를 두어 무엇을 식별하자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래 성품과 본래의 마음을 되찾는 일입니다. 생명의 시초라 할 그곳에는 우주 시작 당시의 원초적 진실과 자연과 사람의 순연한 정기가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깨끗하고 순연함이 지구가 태어날 당시처럼 맑고 깨끗한 원형, 그것을 찾는 그 일이 오늘의 우리 현실에 당면한 기후 위기와 변동에 대처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면 개인 자격설 그 자체를 한 번쯤 운용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