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구리(蘆九里)는 옛날부터 구월이면 바닷가에 갈대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우리말 지명은 갈금이다. 지금의 노구는 갈대 노(蘆) 아홉 구(九)자를 쓰지만 원래는 노구미리로 갈대 노(蘆) 원수 구(仇) 맛 미(味)자를 썼다. 九나 仇味는 한자의 뜻보다는 우리말 구미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구미나 기미는 지형이 들어간 곳을 의미하는 고유어로 구미는 기미나 금으로 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노구미를 갈구미나 갈금으로 읽는 것은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려왔기 때문이다. 노구미리는 육지로 쑥 들어간 곳에 있는 갈대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유포리(鍮浦里)는 놋쇠 유(鍮) 개 포(浦)자를 쓰며 우리말 이름은 놋개이다. 망운산 운암골 아래 면곡(綿谷 綿田洞)에서 화전과 광석을 채취하며 살다가 중턱 정곡(鼎谷)에서 청동이 발견되어 자리를 잡고 금전동이라 부르다가 놋개로 바꿨다고 한다. 후에 노구리에 개편되었다가 유포리가 되었다.

놋쇠는 구리와 아연을 섞어서 만든 쇠붙이로 그릇이나 여러 가지 장식물을 만드는 데 많이 쓰인다. 어원적으로 놀, 눌로, 땅을 뜻하는 누리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천자문에서도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이라고 하는 등 예로부터 땅을 황(黃)색 속성으로 본 것은 오래되었다. 색이 누렇다, 누룽지, 노릇노릇, 등도 같은 계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남상리(南上里)는 작장과 중리 사이에 있는 마을로 남녘 남(南) 위 상(上)자를 쓰니 당연히 남쪽에 있는 상등 마을이지만 행정구역 개편 시에 새로 지은 지명이다. 옛날에는 서면의 중심마을로 주민도 많고 소학교와 면사무소도 있었다.

염해는 처음에는 염해와 중리를 아울러 염전포라 부르고 옛 이름도 염전포리이었다. 염전포는 소금 염(鹽) 밭 전(田) 개 포(浦)자를 쓰니 소금밭개라 불리었고, 동국여지승람에도 현 서쪽 30리에 염밭이 있으며 염전포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금밭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모여 들자 마을은 커져서 구름처럼 일어나라고 운흥동(雲興洞)으로 부르다가 분동이 되면서 남상리와 염해리(鹽海里)로 고쳐 불렀다. 

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염해는 지형이 서해안처럼 넓은 개펄이 있는 곳이 아닌데도 염전이 있는 것은 조선시대의 제염 법은 자염(煮鹽)으로 갯벌의 흙(개흙)을 이용하여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만든 소금을 말한다. 한자는 끓일 자(煮), 소금 염(鹽)을 쓰며 끓여서 만든 소금을 말한다. 천일염을 전통 소금이라고 말하지만 천일염은 중국에서 생산된 기법이고 이것이 일본으로 전파된 후,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옛날에는 소금 자체가 화폐 역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귀했고 자염도 그러했는데, 바닷물을 끓여 필요한 만큼의 소금을 얻는 데 소모되는 비용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바닷물에는 3.5%의 염분이 들어있는데 이걸 얻기 위해선 96.5%의 물을 끓여 날려야 하니 비용이 많이 든다. 조선 후기 들어서 온돌로 연료 소모가 많아졌고 인구증가로 인한 산림파괴가 심각해졌으며 석탄채굴도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생산비용이 해가 갈수록 증가했다. 이 때문에 1940년대까지 일부 유지되던 자염사업은 천일염에게 가격경쟁력에서 밀려 사라지고 2000년대 들어와서 일부 자염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부활하지만 여전히 비싼 가격으로 인해서 천일염보다 대중화되지 못했다.

중리(中里) 마을은 가운데 중(中) 마을 리(里)를 쓴다. 옛날에는 염해마을에 속해 있었지만 후에 남상과 염해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리가 되었다. 이 마을은 예부터 문장이 능한 인재가 많이 배출됐지만 일제 때 이 지역에 신작로를 내면서 산의 지맥을 끊어버려 큰 인물이 씨가 말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십 수 년 전 솔정교를 놓아 끊어진 지맥을 이음으로서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 한다. 

마을에는 1995년 9월에 군보호수로 지정된 세 그루의 소나무가 유명하다. 새로 건립한 솔정교 옆에 자라는 소나무는 가직대사가 심은 것으로 수령 270년, 높이 15m의 수형이 범상치 않은 소나무다. 중리와 남상마을에 있는 소나무와 함께 가직대사 삼송이라 전해진다. 

가직대사는 1747년(영조 23년) 남해군 서면 남상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송학당(松鶴堂)이고 법명은 가직(嘉直, 또는 可直)이다. 가직대사는 어릴 적부터 법력이 비범하여 불교에 입문했다. 고향마을이 접한 망운산 화방사에서 도를 익혀 삼남지방 일대에 포교를 한 불교계의 거성이었다. 또한 여러 가지 도술을 익혀 속세에서도 선행을 베풀었다. 가직대사는 노년에 고향인 남상을 찾아 기가 약한 곳에 나쁜 액이 침범하여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충무에 모임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소나무 묘목 세 주를 가지고 와서 남상리, 중리, 노구리에 각각 1주씩 심었다. 

소나무는 마을 주민들의 보호로 그 자리를 지키며 무성해졌다. 남상마을의 제1송은 수고 15m, 흉고둘레 250cm이다. 남상마을 주민들은 사월 초파일에 가직대사의 뜻을 기리고 동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삼송제를 지내고 있다. 이 소나무 앞에는 가직대사 삼송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중리의 제2송은 수고 15m, 흉고둘레 330cm이다. 마을에서는 시월 보름날 소나무 앞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노구마을 제3송은 수고 15m, 흉고둘레 450cm이며 10월 보름에 동제를 지냈지만 지금은 마을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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