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평소 같으면 햇살이 동녘을 붉게 물들었을 때입니다. 잔뜩 찌푸린 장마를 동반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아침 이슬은 변함없이 영롱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햇빛이 없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이슬, 그 영롱한 빛이 사라지지 않는 자연의 위대함에 동화가 되고 맙니다. 어쩜 이렇게 신비스러울 수가 있을까? 물이란 매체가 빛이 없는데도 어쩜 이렇듯 아름다운 형상을 엮어낼 수 있을까? 이 물은 주변 환경이 녹록하지 않음에도 어찌하여 어제와 닮은 모양과 색상을 어김없이 연출해 낼 수 있을까? 우연인가? 필연인가? 

다시 한번 이슬을 주시하며 모양을 음미해 보며 그 의미를 고찰해 봅니다. 그의 정서를 내면에 담다 보니 크든 작든 우리가 늘 보아오는 일상의 형상들 하나하나는 그냥 우연히 생겨났다기보다 그 이면에는 많은 작용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슬을 보더라도 하나의 이슬이 맺히기까지 전혀 연관되지 않을 줄 알았던 햇빛과 바람 그리고 구름, 비, 달과 별 등 대자연과 우주의 상호작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상호작용의 원리, 개체가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연관된 지혜를 바탕으로 새롭게 현상을 만들며 살아가는 이 기막힌 일이 세상을 이루는 한 축이라는 데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를 보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생명의 시원으로부터 계승되어 영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존재하며 또 그것은 분리 독립되어 있지 아니하고 대 생명과의 상호의존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물의 세계 곳곳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개미들은 각각의 일개미와 개미집단 전체라는 고도로 조직화한 사회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개미 한 마리 한 마리는 단순한 기계적인 존재이면서 매우 제한된 활동 범위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개미집단 전체는 다양하고 정교한 공학적인 창조능력을 보여주는데, 부분과 부분의 상호작용이 비록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여도 전체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크고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논리로서 개체와 전체가 어느 한쪽이 죽임을 당하면 모두가 살 수 없다는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아프거나 다치거나 죽음에 이르면 나와 무관한 것 같아도 그 내밀한 정서로 보면 나와 모두 연결되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아프거나 고충을 겪고 있으면 나 역시 그러한 고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엄정한 질서, 여기서 우리가 직관할 수 있는 지혜가 전체의식에의 고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누구라도 개별의식(생각과 감정)에 쫓길 수밖에 없지만, 그런데도 지식(아는 것)은 많아지는데 지혜가 모자라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제는 전체의식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만약, 우리가 이처럼 보이지도 드러나지도 않는 전체의식 속에 새로운 정신 사조의 길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에도 엄청난 변화가 도래할 것입니다. 전체의식, 이것이 오늘과 미래를 잇는 역동적인 흐름이라면, 이러한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우리가 모두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후대 역사는 변화에 더딘 개별의식의 업보를 그리 달갑게 평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전체의식을 공유할 지혜의 터전은 다른 곳이 아닌 농촌이 그래도 유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정(情)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참으로 아쉽게도 필자가 정말 놀란 것은 어린 시절 보아온, 전체의식이 살아 생동하던 그런 농촌의 정서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옛날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며 함께 하는 마음이 돈독했던 시절의 정서에 비하면 많이 침체해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어린 시절에 느꼈던 그러한 기억을 영영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시대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개별의식에 너무 집착한 풍조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역동적인 활동이나 그가 가진 독특한 개성이 없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은, 아니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모두의 역량으로 만들어 낸 전체의식의 반응이요, 반영의 결과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은덕에 힘입고 있다면 개별의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돋보이고자 하는 의도로서는 작금의 세상 흐름에 일치하지 않는 삶의 행보를 잇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탓인지 몰라도 작은 차이로 벌어지는 경계심리가 모두 개별의식으로 짓는 일이라면 그 미진한 마음 길에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역량으로 전환하는 것은 당연한 시대 요청인지 모릅니다. 그러한 배경에는 영적 지혜의 산실이라 할 하나의 마음이라는 전체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마음, 하나의 본성으로 함께 하는 의식, 전체를 바라보는 혜안 이것은 정신 사조의 일대 전환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그리고 반드시 성취하여야 할 내면의 다짐입니다. 이런 다짐에 부응하는 차원에서 나의 개별의식이 없어져야 비로소 전체가 살 수 있다는 신념이 남해의 인심으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차원에서 특별한 명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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