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게재곡의 한자 지명은 해치리(蟹峙里)였으며 후에 현촌으로 바꿨다. 해치리는 게 해(蟹) 재 치(峙)자를 쓴다. 당연히 우리말 이름은 게재이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의 지형이 물에 사는 게를 닮았다거나, 계곡에 게가 많아 가을이 되면 게를 낚는 사람들이 많아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재가 험해서 게처럼 기어 올라가는 재라는 뜻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게재는 망운산과 삼봉산 사이에 있는 높은 고개로 서면과 고현면을 가르는 경계이다. 재의 동쪽에 있는 웃게재는 현촌(峴村)으로 부르고, 아랫게재는 도산(稻山), 서북쪽에 있는 중개마을은 지금의 중현(中峴)이 되었다. 현촌은 고개 현(峴) 마을 촌(村)자를 쓰니 고개마을 이며 옛 지명은 해티였다.

도산마을은 쌀 도(稻) 뫼 산(山)자를 쓰며 아랫게재라 부르든 하해티(下蟹峙) 마을이다. 쌀과 산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논이 많아 쌀이 많이 생산되는 곳도 아니다. 산에 쌀이 있는 곳은 싸리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다. 전국에는 싸리재가 많다. 싸리는 싸리나무나 봉우리를 뜻하는 수리봉, 수리재와 통하는 말이다.

중현동(中峴洞)은 가운데 중(中) 고개 현(峴)자를 쓴다. 200년 전에는 해치리에 속하여 가운데 있는 고개 마을로 중개, 중재라 불리었지만 지금은 중심 마을이 되어 현촌, 도산, 회룡을 통합하는 지명이 되었다. 옛말에 가재는 게편이라는 말이 있는데 지명에도 가재골이나 가재울이 있다. 골짜기에서 가재를 많이 잡아 가재골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거꾸로 가재골에서 가재가 많이 잡혀서 생긴 유래로 생각된다. 가재골은 갗의 골이 갗애골로 음운변화를 일으켜 가재골로 바뀌었다. 따라서 가재골이란 갗골로서 가장자리에 있는 골짜기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웃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에는 진교면과 양보면 사람들이 하동읍내로 다니는 큰 고갯길이 있는데 조선시대의 지리지와 군현지도에는 해현(蟹峴), 해점(蟹岾), 해치(蟹峙)라고 표기되었다. 여기에도 윗게재, 아랫게재라는 두 고개가 있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게너미고개는 게가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게가 특산물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게와 관계없이 고개가 높고 험하여 기어 넘어가는 고개라는 순우리말이 변화된 명칭으로 보기도 한다. 게너미고개를 해유현(蟹踰峴), 해현(蟹峴), 해령(蟹嶺)이라고도 불렀다. 

회룡마을은 도랑골 도룡골로 불리었으며 한자로는 돌 회(回) 용 용(龍)자를 쓴다. 마을 양쪽에 있는 산의 능선이 마치 용이 감아 도는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중현 마을회관의 남쪽에 있는 운곡사(雲谷寺)는 조선 철종 4년(1853)에 세웠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되었다가 고종 11년(1874)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곡 정희보 선생을 모시는 사당으로 2018년에 도 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사우의 규모는 300여 평의 대지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과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석차례를 봉행하고 있다.

삼남의 거유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 1486~1547)선생은 본관은 진양이며 이동면 초양리에서 효충(孝忠)의 삼남삼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18세가 되던 해에 학문을 배우고자 함양군 수곡리 당곡으로 이거하여 생활하다 나주 박 씨 집안에 장가들어 함양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주학을 깊이 연구한 대학자로 벼슬길을 마다하고 후진양성에 노력한 분이다. 제자로는 옥계 노진, 구졸 양회, 개암 강익, 청련 이후백, 매암 조식, 남계 임희무 등 많은 학자들이 있다.

조용히 초옥을 짓고 오로지 후학지도에 전념함으로써 향후 오백년간 함양지역이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명예로운 선비의 고장으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선생 자신은 관직도 재산도 명성도 연연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포리는 처음에는 우물포리(亏勿浦里)로 불리었으나 지명을 한자로 바꿀 때에 정포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 안에 큰 우물이 4개가 있으며 마을 앞에 바다가 있어 우물개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물포는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1448) 의정부에서 병조의 첩정에 의거해 소나무에 관한 감독 관리에 대해 상신한 내용에 “남해현(南海縣)의 고독절도(孤獨絶島) 금산(錦山) 소흘산(所屹山) 호을포(呼乙浦) 우물포(亐勿浦) 소가도(小柯島) 양가도(兩柯島)의 소나무가 있는 곳에는 나무하는 것을 엄금하고 근처에 있는 수령(守令) 만호(萬戶)로 하여금 관리 감독하여 용도가 있을 때에 대비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우물포는 어조사 우(亏) 말 물(勿) 개 포(浦)자를 쓴다. 한자음을 그대로 읽으면 우물개이지만 같은 시대의 기록에 우물은 움물, 한자로는 우물 정(井)자로 표기를 하였으며 강화도에는 정포진(井浦鎭)이 있어 우물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물 마을은 바다와 인접한 마을이 아니다. 마을 앞 바다에는 우미도(牛尾島)라는 섬과 유독도(乳犢도)라는 섬이 있고 마을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으로 꼬리부분에 해당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물포는 우말포로 읽어 소의 꼬리처럼 길게 들어간 포구라는 뜻이 된다.

우물 마을은 삼봉산 사학산 망운산에 둘러싸인 형상이 우(于)자와 같고 지세가 물(勿)자와 같다하여 옛날부터 우물이라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웃골로 불린다. 우물은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200년 전에도 우물을 한자로 표기 할 때는 정자를 사용하였기에 웃마을이 웃몰, 웃물로 되고 우물로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형으로 볼 때 길게 늘어진 소의 꼬리 끝머리, 미말(尾末), 말미(末尾)에서 온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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