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이면 농부들을 가장 귀찮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 것이 잡초와 풀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금세 솎아내도 또 자라나는 풀과 잡초의 성장 속도를 보면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필자로서도 말로만 듣던 풀의 성장력을 직접 경험해 보니 농부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가히 풀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입니다. 

풀이 자라 논밭 주변을 뒤덮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작물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심각하다 못해 망연자실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풀이나 잡초가 처음 태어날 때부터 그 성품이 억세고 모진 것이었던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생명이든지 처음 태어날 때의 성품은 대체로 온화하고 순수한 심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아니! 풀이나 잡초를 대하는 생각 자체가 너무 감상적이 아니냐고 힐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로 인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해를 보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용인하는 듯한 이야기 자체가 용납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을 충분히 인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보는 현상 그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차원의 생명에 대한 존재감을 방기해서도 안 될 것이라는 데 생각을 모아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최초 생명의 원초적 본능은 피해를 주거나 피해를 주려는 의도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마다 전해 내려오는 유전적 특성이 다르긴 합니다만, 어느 측면에서 보면 자극을 주면 줄수록 자극에 대비한 적극적 방어 자세가 더 심화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풀이나 잡초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식물도 생각이나 감정이 있으리라 추정하고 그들의 사고(思考)를 인정하면서 어떤 연유에서 너희 풀이나 잡초는 그처럼 억세고 강한가에 대해서 심정적으로 대화를 해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영혼의 교감이라든지 아니면 그들의 의식세계를 관통하는 또 다른 차원의 심연을 활용하면서 말입니다. 의식은 의식으로 대응하며 그러한 의식이 하나의 정점에서 만날 때 의외의 성과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연의 세계 그 중심에 최고의 영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기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점을 유추해 보면 모든 생명은 최고의 영적 능력을 갖춘 사람의 마음이나 기운 작용에 따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능력은 하우스재배나 기타 농지에서 농작물을 재배할 때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아름다운 노래 가사를 육성으로 직접 들려주면 식물의 성장에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식물은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흥겨워하기도 하고, 고운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식물학자들의 연구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 이외에도 미국의 식물학자 루터 버뱅크는 가시 없는 선인장을 예로 들며 식물도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또 이에 반응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시가 없는 선인장이 태어나면 좋겠다고 마음을 전하였는데, 실제로 가시가 없는 선인장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를 보면 모든 생명은 식물이나 동물이나 할 것 없이 감정의 교환을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풀과 잡초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나 풀이나 잡초도 사람의 마음 작용에서 당장 척결하고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그러한 인식들이 오히려 더 억세고 굳센 생명력을 지니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너는 나쁘다, 좋지 않다, 없어져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는 순간, 생명은 그러한 외침에 대한 반감작용에서 오히려 더 억세고 강한 생명력으로 돌연변이 되듯 변종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모든 생명이 상호 교감하고 있다는 현상에서 보면 부정은 부정의 느낌이 심화한 생명을 만들어 낼 것이고, 긍정은 긍정의 의지대로 긍정에 버금가는 새로운 종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전혀 불가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최근 코로나바이러스로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이러한 병원균 역시 초기엔 감기 증세였으나, 사람의 마음 작용이 무시무시하고 어두우며 부정의 기운이 심화함에 따라 더 매섭게 결집하여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부정 심리나 분노와 두려움 등의 기류에 편성하여, 더 강화된 부정의 기운으로 다시 뭉쳐지고 그것이 더 큰 부정으로 이어지면서, 무시무시한 괴 생명 종으로 탄생 되듯이 말입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다소 억지같은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상념이나 망상으로 생겨나는 각종 흔적이 흩어지지 않고 갖가지 형상의 괴질로, 더 거칠고 억센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 것을 보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그런 대목입니다. 마치 사람의 마음이 돼지같은 심보를 지니고 있으면, 돼지가 생기고 뱀 같은 심성을 가지면 실제로 뱀이 태어나는 그런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마음은 짓는 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짓는 그대로 됩니다. 이런 점에서 풀이나 잡초에 “너는 싫다, 정말 싫다, 여름 내내 자라는 너의 징글징글한 모습을 보니 정말 징그럽다. 이 억세고 모진 너 같은 풀은 빨리 없어져야 한다”며 강한 제초제를 뿌려 아예 뿌리부터 없애려는 마음을 그들이 느끼는 순간, 그들은 더 모질게 생명력을 과시하려는 의욕이 발동되어 오히려 자연 전체 생명을 무력하게 할 정도의 억센 풀을 양산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만약 사람의 마음이 사랑을 담아내느냐 아니면 미움과 원망을 갖느냐에 따라 식물의 반응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면 이러한 현상을 응용하여 모두가 윈윈하는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 보는 것도 또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마음의 기운 작용을 최대한 활용해 보자는 것입니다. 혹시나 이것이 잘 통용되어 저 억센 풀이나 잡초가 오히려 여타 작물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병충해를 쫓을 수 있는 고마운 식물로 변종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수많은 생명은 그 자체에서 보면 각각 특유의 방사력을 지니고 있는데, 선한 기운을 퍼뜨리면 그 선한 기운 따라 사방팔방에 그러한 기운이 반영될 여지가 있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마음의 작용인데 사랑의 마음을 품고 방사하면 사방팔방 그러한 기운 작용에 따라 전체 생명도 그에 반응하며 사랑으로 동반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잡초나 풀에도 사랑의 마음을 심어 새로운 종의 탄생이 가능하도록 배려해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미흡한 사랑이 아니라, 전체와 전부를 사랑할 수 있는 깊고도 깊은 그런 사랑으로 말입니다. 문제는 풀이나 잡초조차도 감동받을 만큼 큰 사랑을 담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긴 합니다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잡초와 풀과의 사랑, 물론 다소 용납하기 힘든 의견이긴 하나 이를 통하여 각종 작물에 도움 줄 수 있는 새로운 종의 풀이나 잡초가 탄생 될 수 있다면 아마 올해의 여름은 더욱 빛이 나는 계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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